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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칼렛 Dec 06. 2024

왜 풀코스를 뛰려는 거야?



마라톤에 대한 두 번째 연재글을 올리면서 왜 풀코스인지 한 번 짚어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나에게 어려우니까. 쉽지 않으니 도전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솔직한 마음을 들춰내자면, 이미 대한민국에서 풀코스 완주자도 차고 넘치는데 (여자 선수만 추려낸다고 하더라도) 마라톤에 대한 글을 연재할 때는 풀코스 완주라는 정점은 꼭 찍고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 달린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풀코스 도전이라는 허들을 낑낑 온몸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한 번 넘어봤다는 아슬한 도취감에 용기를 내어 보는 것이라고나 할까? 풀코스를 뛰어본 작가님들도 여럿 계시겠지만 그 여정을 나만의 색깔로 한번 신명 나게 표출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하프(21km)는 이미 여러 번 도전해 보았기 때문이다.


1​. 영남일보 국제하프 마라톤 대회 : ​

   2시간 14분 35초 (2023년 6월 4일)


​​2. 달서 하프 마라톤 대회 :

2시간 5분 55초 (2023년 9월 24일)


​​3. 경주 국제 마라톤 대회 : ​

2시간 9분 32초 (2023년 10월 21일)


​4. 진주 마라톤 :  

2시간 9분 45초 (2023년 12월 10일)


5. 달서 하프 마라톤 대회

2시간 5분 53초 (2024년 9월 29일)



 지금 상상을 해풀코스 도전 시, 하프만큼 또 하프를 가야 한다면 아찔하다. 그런데 왜 나는 풀코스를 도전하고 싶을까? 도전하고 싶은 건지 나를 시험해보고 싶은 건지 저울의 양팔에서 도무지 무게가 가늠되지 않는다. 도전하고 싶다면 나의 내면의 욕구에 의한 스스로의 성장에 목적이 맞추어진 듯하고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것은 수많은 완주자가 이미 포진되어 있는 좌표 위에 나도 끼이고 싶다는 사회적인 욕구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이번 계기로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기에, 내 몸의 가능성을 다 쥐어짜보고, 더 이상 경직되어 움직이지도 않는 한계성도 느껴보고 또한 극복해보고 싶기도 했다.

이미 나는 한차례 경험이 있지 않은가? 부족한 연습량과 미흡한 신체의 기량을 온몸으로 느끼며 저벅저벅 움직여갔던 그 순간을. 내가 살면서 언제 또 그런 극한의 체험을 해 볼 수 있으려나. 타의에 의하지 않고 자발적이었기에 가능한 도전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40넘은 아줌마인데 내면의 갈망이 없었다면 언감생심인 일이 아니었을까.


세 번째 이유는 꼭 풀코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하프나 풀코스를 뛰다 보면, 아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장거리 연습을 하다 보면, 예상하지 않았던 생각과 느낌이 내 안에서 번져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이고 에너지 받는 기운 같은 것 말이다.

평소 연습을 20km 이상 한다는 것은 풀코스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뛰어지지 않을, 일종의 자기 최면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신기하게도 오래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뇌에 스치면 딱 거기까지만 움직여지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무조건 장거리를 생각해서 길게 연습한다는 체면을 걸고 나면 100%는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어느 정도까지는 몸이 견뎌준다. 하프길이까지만 연습해도 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중간에 멈춰 화장실을 간다던지, 간식이라도 먹으면 시간은 더 초과되어 자신도 모르게 몇 시간이 길 위에서 훌쩍 지나간다. 그 긴 시간 동안 사람인데 어찌 생각이 안 나고 느낌이 안 들 수가 있을까. 현재의 고민도 곱씹어 보고 자신의 내면의 감정도 들여다볼 수 있다. 인과 관계를 따져 왜 그런 기분이 들었었는지, 문제가 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나의 내면의 문제인지 외적인 스침을 과장해서 안고 고꾸라진 건지...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달릴 때는 더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땀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내며 거친 숨과 단단해진 근육이 합세해 준다면 그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승리의 쾌감이 온몸을 지배한다. 역시 나오길 잘했어! 역시 달리길 잘했어! 자신에 대한 극찬과 뿌듯함이 전율을 타고  온몸을 휘감는다. 요즘은 시계도 정교하게 잘 나와 심박수나 속도, 운동강도, 거리등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이런 지표들을 바라보며 향상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자애심이 증가하는 것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이다.


네 번째 이유는 '풀코스 완주'라는 그 하나가 적지 않은 성취감으로 오랜 시간 자신을 세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비틀거릴 때가 많다. 온몸에 힘이 빠져 주저 않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고 지금이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모든 것이 다시 세팅되는 상상을 할 때도 있다. 내면의 나약함이든, 세상의 가혹함이든, 웃음은 사라지고 자신감이 흩어지는 일들을 겪는다. 열심히 살았는 것 같은데 정작 이루어놓은 것은 그다지 없는 것 같고 쉼 없이 지나가는 세월 앞에서 마주하는 나이는 어떤 때는 너무 이질적이며 믿기지가 않는다.

 그럴 때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기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움직이게 했던 근육처럼 마음의 체력이 되어 일어서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이 순간 손으로 허벅지를 만져봐도 단단하지 않은가. 튼튼한 육체가 있는데, 아직 건강하게 도전해 볼 수 있는데 쓸려가 상처가 났더라도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오늘 브런치에서 읽은 글귀 중에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과거에 집착해서 그렇고

  불안한 이유는 미래를 걱정해서 그렇다."


는 말이 있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불안하다고 느끼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양상이 많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고 히말라야의 크레바스에 빠진 듯 추위와 외로움에 죽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풀코스를 해냈다는 자신감은, 그것을 위해 연습했는 동안 갖추어진 체력은 어려움을 더 빨리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해냈는데, 정말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끝까지 달렸는데 지금의 상황도 내가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의 시그널을 남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풀코스를 도전해보고자 한다. 아니 벌써 신청은 되어 있다. 이렇게 공포했는데 완주 못하면 부끄러움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완주의 깃발은 나의 편에서 힘차게 펄럭이길 바란다.






https://brunch.co.kr/brunchbook/scarlet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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