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ul 17. 2023

장마는 민원실 공무원에게 일감을 보태줬어

그것도 아주 성가신 걸로

2023. 7. 1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습해서 그럴 거야. 전에 장마철에 근무해 보면 프린터 오작동 잘 나더라고. 용지가 진짜 잘 걸리고 출력도 잘 안돼. 제습 좀 하고 다시 출력해 봐."

얼마 전 남편이 프린터를 쓰려고 하는데 자꾸 종이가 출력이 되지 않았다.

딱히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 빨간 불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습하면 기계도 말썽을 부리기 일쑤다.

"어떻게 알았어? 진짜 습기 좀 제거하니까 잘 나온다. 정말 습기 때문에 출력이 안 됐나 봐."


해마다 이맘때면 민원실에서 장마철 근무를 하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민원인들의 불쾌지수도 높고 습도도 높고 무인발급기 오작동으로 기계 담당자를 호출하는 일도 잦았다.

민원실 특성상 거의 컴퓨터와 프린터와 무인발급기에 의존하여 일을 하곤 했다.

결국엔 담당자가 움직여야 일이 시작되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은 읍, 면사무소마다 거의 무인 발급기가 있다. 무슨 기준으로 무인발급기를 설치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간혹 없는 곳도 있고, 어느 규모 이상 되는 병원에도 무인 발급기가 설치되어 있어 등, 초본이나 가족관계 증명서 같은 서류는 지문으로 손쉽게 발급을 받을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섬으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승선 절차상 신분증을 요구하므로 신분증을 챙겨가야 하지만 깜빡하고 못 챙겨 온 여행객을 위해 친절히도 무인발급기가 놓여 있었던 기억이 있다.

새삼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걸 느낀다.

물론 자신의 지문이, 대개는 오른쪽 엄지 지문이 선명히 잘 등록되어 있고 그 지문이 지금까지도 닳지 않고 무인 발급기에서 잘 인식이 된다면 말이다.


가뜩이나 지루한 장마철에 몸도 마음도 상쾌하지 못한데 그럴 때 덩달아 온갖 기계들도 말썽을 자주 부린다.

내가 근무했던 한 사무실의 민원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정말 짜증이 날 정도로 발급 용지가 인쇄기에 자주 걸려서 나의 불쾌지수를 한껏 올리곤 했다.

민원을 상대하다가도 무인 발급기 담당자인 죄로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거기 매달려 끙끙대야만 했다.

무인 발급기에는 인쇄 트레이가 3개 정도인가 있었다.

토지대장이나 토지이용계획 확인서 같은 서류를 발급할 때 사용되는 A4용지용, 등, 초본 인쇄용지용, 부동산등기부등본 발급 용지용, 하나가 더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정확하지는 않다.


매일 퇴근 전 마감할 때 전산으로 잔량 확인을 하면서 매일 아침 용지 잔량을 실제로 확인하고(가끔 전산상의 잔량과 실제 잔량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생겼으므로, 그럴 땐 정말 성가시다), 그날그날 퇴근 전 다시 용지 정산을 바로 꼬박꼬박 해야 한다.

등, 초본 용지는 인감 발급 용지도 마찬가지지만 외부로 유출되면 절대 안 되므로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

기관장 확인까지 받으며 매일 용지 결산을 해댄다.


장마철은 기본적으로 공기 중에 습기도 많을뿐더러 기계까지 습해지는 건지 잘 인쇄되어 나오다가도 일을 하기 싫은지 멈춰버릴 때가 많았다. 기계가 오래돼서 그런가?

그것도 은근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금방 해결도 안 나고 업체에 전화하면 한참이나 걸려서 담당 직원이 출장을 와서 손봐주기 때문에 그 사이에 일이 더 늘어난다. 일을 보다가 멈춰버린 기계 앞에서 이제 민원인은 나를 상대로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내가 그랬나? 기계가 그랬지? 내가 잘못했나? 기계가 잘못했지? 내가 그러라고 했나? 운 나쁘게 그렇게 된 것뿐이지 하필이면 그때.

사람 손을 덜어주려고 설치한 것이 오히려 천덕꾸러기가 돼서 일을 더 만들고 있으니.

무인발급기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만큼은.


그나마 한 대만 있는 곳은 양반이지.

내가 근무했던 곳 중 한 곳은, 밖에 24시간 돌아가는 무인발급기 1대, 실내에 근무시간 중에 돌아가는 무인발급기 2 대. 총 3 대나 있었다.

그렇다고 사무실 안에서 민원서류를 발급해 주는 담당자가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얼마나 민원인이 많이 드나드는 곳인지 기계도 바쁘고 담당자들도 바쁘다. 하루 평균 300명 이상의 민원인이 단지 등초본이나 인감 등 서류를 떼기 위해 방문한다. 물론 그들은 한 두 가지의 서류만 떼는 법은 없다. 실제로 인간대 인간으로 대면 민원서류 발급이 그 정도고 3대의 무인 발급기를 사용하는 민원인까지 합하면 꽤 될 것이다. 무인 발급기 3대를 매일 정산하다 보면 많을 땐 몇 백 원짜리 서류를 떼는 기계에서 몇십만 원의 증지 수입이 발생한다.

일하다가 여기저기서 기계가 이상하다, 용지가 떨어졌다 안 나온다, 사용할 줄 모르겠다, 왜 내 지문이 인식이 안 되는 거냐,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면 나는 당장 눈앞에 앉아있는 민원인 상대하기도 바쁜데 무슨 무인 발급기를 3 대씩이나 설치해 가지고 담당자인 나를 못살게 구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1년 내내 살아 봐야 등본 한 장 뗄 일이 없는데 남들은 무슨 서류를 저렇게도 다양하고 많이 떼어가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남들은 가진 재물이 (많이, 혹은 조금이라도) 있으나 나 가진 재물 없으니...... 결론은 그렇게 났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아직은 기계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눅눅한 장마철만큼은 사람 손이 최고다.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혹 어딘가에서 기계 고치는 AI가 설계되고 있을지언정.

그나저나 피해는 그만 주고 지긋지긋한 장마가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한밤 중에, '조기집행'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