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1.<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 또 병이 도졌나 봐. 가방이 사고 싶네."
"아니, 병이 도진 게 아니라 그 병은 항상 있었어.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잖아."
조신하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옆으로 웬 런닝맨(러닝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아저씨)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 런닝맨을 조심해야 한다.
가능하면 말도 섞지 않아야 옳다.
"가방을 보니까 가방이 사고 싶네. 어쩌지?"
"안 봤어도 사고 싶을 예정이잖아?"
"가방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는데."
"하나가 아니라 열이고 스물이고 많을수록 좋을 예정 아니었어?"
"보니까 계속 사고 싶어."
"안 보면 될 것 가지고 뭐 하러 쓸데없이 또 보고 그래?"
"사고 싶은데 어쩌지?"
"그럼 사지 마."
"그래도 하나 더 있으면 좋잖아."
"지금 메고 다니는 것들은 무슨 망태기야? 이미 가방이 있는데 또 사?"
"그래도 세일할 때 사 두면 좋잖아."
"앞뒤로 메고 출근하려고 그래? 이미 집에도 두 개나 있잖아. 그거 산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두 개 다 올해 산 것들이잖아?"
"그래도 여유 있게 있으면 좋지."
"이번엔 사서 머리에 쓰고 다닐 거야? 신고 다닐 거야? 사서 다 어디다 쟁여 둘 건데? 공간은 한정돼 있는데 왜 자꾸 짐을 늘리려고 그래?"
"진짜 어떡하지?"
"진짜 안 사는 게 좋을 거야."
"그래도 세일하는데?"
"세일 안 한 적 없다니까? 내일도 하고 다음 달에도 하고 내년에도 하고 우리 죽고 난 다음에도 평~생 세일 할 거라니까!"
"그래도 지금 완전 특가란 말이야."
"있는 짐들도 귀찮은데 제발 일 좀 그만 벌여."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다.
사지 않는 남자와 허구한 날 사는 남자(=사야만 하는 남자=사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 남다른 쇼핑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남자=쇼핑 없이 못 사는 남자=하필이면 우리 집 동거인= 하필이면 어떤 런닝맨=하필이면 내 남편)
안타깝게도 후자가 바로 한 집에 사는 런닝맨이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옷감을 걸친 그 남자.
새 가방보다도 새 러닝 장만이 더 급해 보이는 그 남자.
집에선 항상 상의 '드레스 코드'가 새하얀 러닝인 그 남자
세일한다는 그 가방 살 금액이면 러닝 도매상 하나도 차리겠다.
계속 타박하는 내게서 피신해 골방에 들어갔던 런닝맨이 갑자기 튀어나와 한마디 하셨다.
"이제 곧 구두 오겠다. 세일하길래 하나 샀어."
태초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가방을 충동구매하기 전에
새 구두를 장만한 런닝맨이 있었다.
세일,
런닝맨에게 세일이란,
나에게 세일이란,
세: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
일:일단 저지르고 보는 저돌적인 말
SALE
(S) 신물 나게 사는 것
(A) 아무거나 사는 것
(L) 엘레강스하지 않아도 사는 것
(E)이고 지고 메고 신고 쓰는 온갖 삼라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