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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Sep 05. 2023

투블럭을 주문받고

보기만 했어

2023. 9. 4.

< 사진 임자 = 글임자 >


"고모, 이왕이면 투블럭으로 해주세요."

조카가 말했다.

"뭐? 투블럭?"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내게 헤어스타일 손질을 맡긴 이들 중 그 누구도 이렇게 자세하고도 명확하게 본인의 스타일을 요구한 손님은  없었다.

물론, 당황스러운 이유는 그렇게 말한 손님 때문이 아니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투블럭' 앞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고모, 좀 짧게 잘라주세요. 그렇다고 너무 많이는 말고.  그냥 투블럭으로 깔끔하게요. 시간 얼마나 걸려요?"

주말에 큰 오빠네가 출장차 왔다가 친정집에 들렀다.

오빠에겐 자그마치 세 명의 아들이 있다.

가장 연장자인 고등학생은 학업에 힘쓰느라 그날도 동참하지 않았고 초5, 초1인 두 아들들만 온 것이다.

트블럭이라, 전에 이미용을 배울 때 보기는 했다.

들어는 봤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몇 번 영상을 찾아보며 나름 연구도 해봤다.

하지만 실습은 하지 않고 이론만 빠삭하게 무한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쉽지 않을 일이었다.

"투블럭은 하나도 안 어려워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당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초보 미용사 누구라도 일단 저지르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혹 하게 하셨고, 이는 처음 미용을 배우는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시며 두통수에 이니셜을 새기거나 특수문자로 뽐낸 헤어스타일들을 심상하게 넘기셨다.

그분 말씀만 듣고 있으면 나도 바로 그 자리에서 가르마를 타서 위쪽만 고정해 놓고 아랫부분은 빡빡 밀어버리면 그만인 게 투블럭, 투블럭 그까짓 거 둘로 나누면 그걸로 끝이라고, 나누기만 잘하면 된다고 오만방자하게 생각도 했다.

아니, 그렇게 단단히 착각했다.


"어떡하지, 나 사실은 투블럭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라고는, 손님 떨어져 나가는 경솔한 발언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 기다려 봐."

일단 손님을 안심시켜야 했다.

알았다고만 했지 조카의 요구대로 정확히 투블럭으로 완성해 주겠다고는 안 했다.

"금방 끝나죠, 고모? 미용실 가면 10분 정도면 다 끝나던데요?"

아니, 틀렸어.

100분이야, 여기는, 아마도, 어쩌면.

너 미용사 잘못 골랐어.

(물론 조카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큰오빠의 명령이 떨어져서 두 조카들은 내게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는 투블럭을 요구했지만 쓰리, 포, 몇 블럭이 나올진 나도 모르겠어.

어차피 우린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잖니?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고 말이지.

그냥 손님은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고모, 언제 끝나요? 아직 멀었어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기다려. 지금 하고 있으니까. 길어야 5분에서 10분이야."

얘가, 좀 참을성이 없는 편 같네? 그렇게 안 봤더니 말이야.

뒤통수 아래에서 블럭의 경계가 자꾸만 흐려지면서 위로 위로 영토 확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광개토대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뒤통수 정복활동을 펼칠 것인가.

사람의 눈이 앞에만 달리고 뒤에는 달리지 않은 것에 눈물 나게 감사했다.

조카는 제 눈으로 뒤통수의 현실을 마주할 수는 없으리라.

대신 누군가로부터 제보는 받을 수 있겠지.(등교 후 친구들이 반응이 이상하면 당장 내게 전화라도 하겠지. 다행히 월요일은 무사히 넘겼다.)


이발을 할 때마다 들쑥날쑥한 나이롱 이발사의 실력 때문에 일정한 헤어스타일이란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이상하다, 교수님이 자꾸 하면 는다고 그러셨는데...

하면 할수록 세상에 없던 스타일들이 속속 등장한다.

마치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제3세계 음악처럼.

요상하다 못해 기괴하고 아리송해지는 예술행위처럼.

난해하고 대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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