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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Sep 12. 2023

미필적 고의에 의한 꼰대

나에게 무엇을 준 거지?

2023. 9. 8.

< 사진 임자 =글임자 >


"당신 같은 사람보고 뭐라는 줄 알아? 당신 정말 꼰대야. 아직도 구식 마인드야."

이게 무슨 집밥 잘 먹고 밥값 못 내겠다고 시위하는 소리야?

나는 그럴 줄 알았으면서 왜 또 그랬을까.


"어디야?"

"집이지."

"나 이따가 점심 먹으러 갈 수도 있어."

"왜 사람들 없어?"

"한 명 있는데 안 드실 거래."

"그래서 와서 먹는다고?"

"혹시 못 가게 되면 연락할게.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일단 저렇게 알고 있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40분이 조금 넘었었다.

한 시간 정도 준비하면 충분히 점심을 차릴 수는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다가는 갑자기 들이닥친 그 사람을 보고 놀라 자빠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한다.

한여름의 무더위로 인한 일사병, 열사병만큼이나 위험천만한 것이 생각지도 못한 직장인의 집밥 타령이었다,

그것도 점심으로다가.

나는 또 다짐했다.

긴 말은 안 해야지.

최소한의 말만 해야지.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해야지.

아니, 물어도 못 들은 척해야지.

먼저 말을 걸지 말아야지.

듣고나 있어야지.

만에 하나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듣고야 말았다면, 듣고 잊어야지.

감히 내 의견 같은 거 입도 뻥끗하지 말아야지.

자칫 잘못하다간 그 사람이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가정법원으로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침에 먹은 반찬을 그대로 다시 올리기가 좀 그래서, 게다가 요즘같이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직장생활씩이나 하시는 분이니 점심 한 끼 정도 차리는 것은 충분히 할 만하다. (나도 그렇게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매일 와서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그러나 어쩔 때 종종 오는 느낌이다.) 본인께서도 전~혀 입맛 까다로운 분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을 하시니 그저 간단하게 국거리 하나 사서 뭐라도 하나 팔팔 끓여내면 될 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운동도 할 겸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축지법을 써서 부랴부랴 시장을 봐서 탕 하나를 끓였다.

왕복 30분 이내의 거리에서 두 곳을 들러 재료를 사서 조리를 시작한 지 10분 후 그 사람이 마침내 들이닥쳤다.

"맛있는 냄새나네."

갑자기 쳐들어 온 그 사람을 저승사자 보듯 하며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대꾸했다가는 최소한 징역살이 3년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

아무리 이제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정도는 잘 안다.

"역시 집밥이 최고야."

그 사람은 기원전 2,000년 경에 녹음해 둔 그것을 연속 재생하며 잘도 드셨다.

애초에 나는 그 맞은편에 지 말았어야 했다.

"근데 다른 직원은 진짜 안 드신대? 그냥 한 말인데 옳다쿠나 하고 집에 와 버린 거야? 같이 드시자고 인정상 한 번 말이라도 해 보지 그랬어?"

3,

2,

1.

"당신 같은 사람 보고 뭐라는 줄 알아?"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이 진짜 꼰대야."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태어나 저런 귀한 말도 다 들어 본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마인드야?"

이런 마인드 = 뷰티풀 마인드.

"내가 꼭 그걸 물어봐야 돼?"

말은 똑바로 하자. 꼭 물어보라고는 안 했다.

"본인이 싫다고 선을 딱 긋는데 내가 뭐 하러 또 물어봐?

내가 선을 그었는지 이었는지 무슨 수로 알아?

"하여튼 당신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꼰대라니까."

어찌나 열정적으로 내가 얼마나 '꼰대'인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시는지 나는 그 단어가 '남편이 점심에 오기로 되어 있어 여전히 무더운 날씨에 (청승맞게도) 굳이 운동삼아 가겠다며 두 군데의 마트를 들러 탕거리를 공수해 와 에어컨도 켜지 않고 인덕션 앞에서 얌전히 음식을 만들어 내는 아내를 일컫는 말'인 줄 오해할 뻔했다.

아차차, 그냥 그 사람이 하는 말 듣기만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주책없이 또 왜 끼어들었단 말인가.


"내 말은 그래도 같이 일하는 직원이고 연장자이고 그러니까 그냥 인정상 한번 더 확실히 알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그런 의미였는데. 당신이 좀 더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급수가 낮다고 해서 무조건 그 직원을 챙겨야 된다거나 일일이 다 신경 쓰고 살아야 한다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보통 한 번은 그냥 거절하는 경우도 많고 해서 한 번 더 정확히 하면 어떨까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이 나를 꼰대로까지 등극하게 하는 어마무시한 말이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옛날에 나는 그런 경우가 없어서, 하도 오래된 일이라 생각도 안 나서 그랬어. 그냥 자연스럽게 다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그랬던 것 같아서. 누구 하나 빠지겠다고 하면 그래도 같이 가자고, 이왕이면 같이 먹자고 그렇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고 무조건 싫다는 사람 억지로 데려가자는 말도 아니었고. 입이 방정이었네 내가. 쓸데없이 또 끼어들었구나 내가. 애먼 발등을 찍었구나 내가. 부스럼 티끌을 모아 전시회라도 열려고 그것을 기어이 긁었구나 내가."

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이거다 저거다 일일이 지적하며 간섭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꼰대라고 했던 그 사람에게 나는 간절히 그 단어를 사용하고만 싶었다.


반, 사!


( * 신변 보호를 위해 상대방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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