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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Sep 20. 2023

신규자의 통과의례,이장님들 앞에서 자기소개 하기

저도 준비가 필요했었는데요.

2023. 9. 19.

< 사진 임자 = 글임자 >


"임자씨, 오늘 이장 회의 때 이장님들께 인사 한번 해야지?"

"네? 인...사요?"

"당연히 인사해야지. 그래야 이장님들 얼굴도 익히고 그러지. 아무튼 준비하고 있어."

준비요?

도대체 무슨 준비를, 어떻게요?

면장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 연가 쓰는 건데.

하지만 절대 그 연가 신청서는 결재가 나지 않을 것이다.

계장님 선에서 반려될 것이다.


"오늘 이장회의 때 인사 할 준비 해 왔지?"

아침에 출근하자 옆의 주사님께서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만 모르고 면장님과 계장님 사이에는 이미 합의를 보신 사항이었나 보다.

예상하지도 못한 말씀에 나는 넋이 나갔다.

나는, 그러니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없었으면 좋겠는 그런 사람이다.

어디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활달한 성격도 아니고, 게다가 그 당시의 나는 암울했던 장수생 신분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사람(사람이긴 했으려나?)이었다.

최종 합격자 발표까지 후다닥 해치우고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볼까 마음먹자마자 부모님 농사일에 적극 투입됐고, 발령은 빨라야 서너 달 후에나 나겠거니 하고 여유 부리고 있었다.

서러웠던 장수생 시절에 다짐했던 '합격 후의 계획'은 차차 하나씩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으나, 어느 것 하나 실행에 옮긴 것도 없었고 한창 농번기인 시골에서 매일 전원일기만 찍고 있었다.

겉보기에 사람의 형색은 갖추었으나 아직 그 수많은 무리들에 어울리기엔 좀 무리다 싶었다.

공무원이 첫 발령을 받으면 첫 이장회의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게 법에 있나 보았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실이다.

이렇게 불쑥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툭툭 튀어나와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신규자는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도 몰라 난감하기만 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새로운 직원이 왔으니, 게다가 첫 발령지였으므로 인사를 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는 모든 게 어렵기만 하고 겁났다. 아직 직원들 얼굴도 정확히 못 익힌 마당에 수 십 명씩이나 되는 마을 이장님들 앞에서 인사를 드리라니.

면장님, 제게 너무 가혹하십니다.

그냥, 전체 이장님들께 단체문자 한 통 보내면 안 될까요?

새올 시스템에 이장님들 연락처 다 있던데, 아무리 컴맹이라지만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럴 때 쓰라고 알리미에 문자 단체 발송 기능이 있는 거 아닌가요?


이장님들께 인사를 드리라는 면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자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

나한테 미리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장 회의 때 이장님들과 많은 직원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자리에서 자기소개하기 시간을 가질 테니 각오라도 하고 있으라고 말이다.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꿀꺽하고 오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조직사회는 신규자의 의견 같은 것은 애초에 묻는 법이 없었다.

물어본다 한들, 내가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미 다 짜인 시나리오대로 나는 무대에 올라 크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만한 수준에서 내 임무를 완수하고 내려오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갑자기 다시 수 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면접시험을 보는 느낌이다.

아니지, 면접'당하는' 기분이었다.

30년 전 어느 웅변대회(기원전 5,000년 경에 웅변대회라는 게 있었다.)에서 가뿐히 예선탈락한 전과가 있는 나는 남들 앞에 서는 게 자신 없다.

그런 자리는 어렵기만 하다.

어쩜 하루라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순순히 넘어가는 날이 없냐.


첫 발령 날 전 직원 앞에서도 자기소개 같은 건 안 했다.

이미 나에 대한 소문('누구 조카라더라'를 시작으로 고향이 어디라더라 어쩐다더라 저쩐다더라 등등)이 그 면사무소에 쫙 퍼져서 내가 보탤 말도 없기도 했었다.

그냥 무조건인가?

아니지, 하루 전에라도 말씀해 주시지.

그랬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물론 그랬더라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발령받아서 모든 게 다 어설픈데, 결정적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하지?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고 나는 회의 시간이 임박하자 회의실로 '끌려갔다.'

'저 뉴 페이스는 누구인고?' 하며(발령 첫날 '처음 보는 색시네'하며 다가온 장가 못 간 아들을 둔 할머니처럼) 의아한 얼굴로 많은 사람의 눈길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명찰(그러니까 OO면 글임자라고 새겨진 조각)을 단정히 차고 계단을 오르기 전 매무새 한 번 더 확인하고, 분을 찍어 바르고 면장님이 지정해 주신 자리에 서서 심판의 시간을 기다렸다.

면장님의 훈화(?) 말씀, 각 계 대표의 자료 발표, 중간중간 이장님들의 질문들 속에서 나는 어지러웠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훈화말씀을 듣는 중이었다면 픽 하고 쓰러지기나 할 수 있었을 것을.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는 그 넓은 곳에서 기어이 나는 앞으로 내몰렸다.

"자, 오늘은 이번에 우리 면사무소로 첫 발령을 받은 글임자씨를 소개하겠습니다."

드디어 나는 앞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소개하기' 시간을 가졌다.


뭐라고 말했는지 도통 기억에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뚫어져라 내 얼굴만 쳐다봤다는 어마어마한 기억, 그 기억만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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