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부부의 외출, 내가 그럴 줄 몰랐네.
아는 사람이 더 무섭고 믿는 사람이 더하고 해 본 사람이 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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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자
Sep 17. 2022
22. 9. 15. 이제 줄기에서 떨어진 지 오래다.
< 사진 임자 = 글임자>
멀어진다는 것,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잊힌다는 것,
결국은 상관없는 그런 것.
문득 생각나는 그 신분의 그늘.
어영부영하다가 지방 선거 사전투표일에 투표를 하지 못했다.
별생각 없이 단순히 선거 당일에 집 앞으로 투표를 하러 갈 생각이었다.
주민등록상 주소지는 다른 곳이었지만 사전 투표날에 전국 아무 데서나 투표하던 기억이 나서 정말 '진심으로' 별생각 없이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한가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른다.
남편 먼저 들어가고 내 차례가 돼서 선거인 명부를 뒤적이는 사람에게
"브런치 지역인데요?"
했더니, 당황하며
"그럼
다음
주소지에서만 가능하신데요."
이러는 거다.
그가 당황했다고 느낀 건 순전히 기분 탓이었으려나.
그 당황이란 게 '누구나 다 아는데 왜 엉뚱한 데로 투표하러
왔수?' 이런 종류의 당황스러움,
이라고 괜히 도둑은 제 발이 몹시도 저렸다.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나에 대한 당혹스러움, 내가 나를 당혹스러워했다.
분위기 파악하는 데 몇 초 걸렸다.
아뿔싸!
맞다 맞아, 사전투표만 '전국 어디서나'였지.
선거 당일은 주민등록지로 가라 했었는데, 나 혼자 착각해가지고 별생각 없이 가 버린 거다.
2009년 공무원 임용된 이래, 사전 투표가 생긴 이래 선거 당일 투표를 해 본 적이 없으니 까마득해서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선거일에는 항상 투표소에서 근무를 해야 했으므로 사전 투표만 해 와서 그런 어이없는 착각을 한 거라고 혼자만 변명거리를 찾았다.
선거 당일엔 선거업무 종사자로 새벽 5시 정도부터 오후 7시 정도까지 일을 해야 하니 당연히 그날은 투표를 할 수가 없다.
사전투표만 했었다.
창피했다.
기원전 5천 년 전쯤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한때 공직생활도 조금 하고, 선거 일도 하고, 민원실에서 선거인 명부도 작성하고 했던 사람이 이게 저지를 법한 실수인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저질렀다.
10년은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매일매일 익숙해서 눈 감고도 할 것 같았던 일들도 이젠 가물가물 기억에서 지워져 가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덕분에'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마스크를 뚫고 나의 당혹스러움이 인사를 건네기 전에 서둘러 신발을 꿰찼다.
"난 하도 자신 있게 말하길래 맞는 줄 착각했다니까."
남의 편이 하는 말이다.
암만, 내가 꼬투리를 손에 쥐어 주었으니 잡히기도 해 주어야지.
사전투표 안 해도 돼. 그냥 선거 당일에 집 앞에서 하면 되지.
<사전투표를 거르고 내가 자신 있게 했던 말>
분명 선거공보물에도 그런 말이 안내돼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자세히 안 봤겠지.
세상에 만상에, 이렇게 창피할 데가.
그즈음 운전하다 보면 도로변의 현수막에도
'사전선거는 전국 어디서나, 선거 당일은 주소지에서'
이렇게 친절히 안내돼 있었다.
내가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가장 싫어했던 그런 유형의 민원인, 딱 오늘의 나 같은 민원인이었다.
안내할 거 다 하고 해도 본인이 제대로 안 살펴보고는 '안내도 안 해줬다'라고 마구 우기는 민원인, 그 전형적인 민원인 짓을 기어이 그날 하고 말았다.
그 어려운 일을 해냅니다그려.
진상의 민원인을 상대하다 진상 민원인이 되어가는 세대교체의 찰나, 아니 신분 교체의 순간이다.
남의 편이 하루 종일 시집살이시킨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더니, 한때 공무원으로 선거 일도 다 해봤던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모를 수가 있어?"
종종 그는 행정실에서의 회계업무에 관해, 나는 최일선 행정의 모든 것들에 관해 서로를 가르치려 들며 오만불손 방자함의 극치를 달리던 사이였는데 그날은 상황이 내게 너무도 불리했다.
"하도 사전 선거만 해서 착각했다 왜?! 사람이 착각할 수도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자신 있게 얘기했는지 나까지 착각할 뻔했다니까."
"실수라고 실수!"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 일을 안 해 본 사람도 아니고 해 본 사람이 어째 그래?"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래도 이해 안 돼. 착각할 게 따로 있지. 일 한두 번 해봤어?"
"아, 정말 착각했다니까."
"난 진짜 이해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사람이니까 착각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아무리 착각이라고 해도 그런 걸 착각할 수 있나?"
"그러니까 사람이지."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그런 착각은 잘 안 하는데?"
"적당히 해. 착각 좀 한 거 가지고 왜 그래?"
"착각할 걸 해야지. 그 일을 안 해본 사람도 아니고."
"갱년기라 그런다 왜!"
"하긴 요새 하는 거 보면 진짜 갱년기 같긴 하더라."
기승전갱년기.
쇼윈도 부부가 부부동반으로 투표소에 나가는 게 아니었어.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실수는 바로 그것이었다.
애먼 갱년기가 도래했다.
이른 퇴직만큼이나 나의 소중한 갱년기도 일찍 소환해 버렸다.
요즘은 걸핏하면
"갱년기야."
이러면 그럭저럭 넘어간다.
꼬치에서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야금야금 남용하기 시작했다.
무슨 대통령 부부도 아니면서 어쩌자고 남의 편을 동반해서 투표소에 갔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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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해봤다, 부부공무원
05
교육행정직렬이 이해하기 힘든 일반행정직렬의 세계
06
정근수당과 명절휴가비와 그 밖의
07
쇼윈도 부부의 외출, 내가 그럴 줄 몰랐네.
08
감히 '남의 편'에게 '힘들다'라고 말했다가...
09
설마설마했는데,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도 해봤다, 부부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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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남의 편'에게 '힘들다'라고 말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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