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고 또 이별한 이야기, 사랑이 절박함으로 잊히네

과거가 될 현재를 살 뿐이었다.

by 글임자
22. 9.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걸리는데 막둥이랑 임자 네가 제일 걸린다."

"명산 댁, 내가 나중에 공무원 되면 많이 용돈도 드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드릴게."


"나 3년 정도 나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아니, 자신 없어."

스물아홉이라는 숫자가 위태롭게만 다가왔던 ,

서른을 고작 세 달 앞둔 가을날이었다.

다시 한번 그와 나의 가을을 채 들이마시기도 전에 우리의 계절은 끝났다.

살다 보면 사람 일이라는 게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도 거짓말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정말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마음가짐에 따라 앞으로의 처지가, 환경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다 하기 나름이겠지만 그 공식이 안 통할 때도 종종 있는 법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합격할 때까지 거의 태어난 곳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내 옆엔 항상 할머니가 계셨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한 방을 썼고 가족 중에 할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도 나였다.

공무원 시험공부한다고 집에서 벗어나 처음 혼자 살게 됐을 때도 종종 들르시곤 했었다.


'명산 댁'

할머니의 택호이다.

장난 삼아

"명산 댁, 명산 댁!"

이렇게 할머니를 부르곤 했었다.


나의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나와 막내아들(나의 막내 삼촌)이 제일 걸리신다 하시던 할머니는 2007년 대통령 선거일을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 경황도 없어 우리 가족은 아무도 투표하러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돌아가시기 두 어 달 전부터 급격히 할머니의 병세가 심해졌고, 아무 직업도 없는 데다가 마침 그 해의 시험에서 공평하게 전부 떨어져 불합격의 해로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 부모님이 급히 호출하셨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할머니 간호에 매달렸다.

계속된 낙방에 심신도 지친 상태(솔직히 지쳤다고 당당히 말할 만큼 열심히도 아니었으면서)인데 이번에도 또 부모님은 내 마음 같은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함마저 느끼던 시절이다.

아! 직업 없는 설움이라니.

그러게 진작에 정신 차려서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합격해서 용돈 한 번이라도 쥐어드렸었더라면 얼마나 좋아.

뜬금없지만 정말 부모님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고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진 더 못 기다려주신다.

당시 나의 공무원 카페 '구꿈사' 아이디는 위 내용과 아주 연관이 깊었다.


할머니 간호라고 해봐야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음식 해서 진지 차려드리고, 손톱, 발톱 깎아드리고, 목욕시켜 드리고 말벗이나 하고 그런 것들 뿐이었지만 못난 손녀는 그 두어 달 동안에도 슬슬 불안함을 느꼈다.

한 번 농사짓고 휴경 기간 지나면 다시 씨 뿌리듯 국가직, 지방직, 서울 지방직까지 공무원 시험 일정이 끝나면 빈둥거리기만 했으면서 말이다. 10월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신 12월까지 보내고 나니 금방 다음 해 시험을 준비해야 할 시기였다.

따지고 보면 전에도 시험 몇 달 전에 공부하는 시늉만 하고 떨어지면 집에 가 있다가 다음 시험 생각나면 다시 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했으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 몇 달이 내겐 몸통이 동강나버린 것처럼 다시 공부에 매달리는 게 쉽지 않았다.

나처럼 이렇게 안일하게 공부하는 수험생도 없을 거야.


수험생은 어떻게든 계속 공부습관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그 흐름이 깨지다 못해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져 먼지가 되어 날아 간 느낌이었다.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스트레스 중에서 배우자의 죽음이 최대 스트레스라는데 당시 배우자가 없던 나에겐 할머니의 일이 그랬다. 스트레스라기보다 차라리 엄청난 충격이었고, 갑작스러웠고 그런 일이 내 수험기간에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수험기간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그래야만 한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고 힘들었던 건 아마도 '할머니의 상실' 그 영향도 적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수험생이니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물론 사랑하는 할머니의 부재는 나에게 커다란 슬픔이었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매일 슬픔에 잠겨 있다고 해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절대 다시 돌아올 수는 없으니까. 최대한 일찍 정신을 차리고 내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혹시 지금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슬픔 속에 놓여 있다면 그 속에서 너무 헤매는 시간을 오래 보내지 않기를 바란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오랫동안 좌절하고, 이별했다고 눈물에 파묻히고, 갑자기 힘들어진 환경에 원망하는 마음만 가지는 것은 정말이지 그 누구에게라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 얘기까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도 없이 떨어진 나도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국 헤어지고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기분도 들었었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눈물만 흘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혼자서도 뭔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대낮에 이별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취방으로 돌아와 바로 책을 보고 인강을 들었다.

정말 거짓말 않고 슬픈 마음도 없었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동안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다 거짓이었나?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나는 어떻게 된 사람이란 말인가.

친구들은 '독하다'는 말로 나를 쿡쿡 찔러댔다.

끄떡하지 않았다.


수험 기간 내내 분명히 그는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더 이상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 가서 공부를 더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공부를 해야 했다.

몇 년이 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자신 없다고 했다.

아마도 서서히 그의 마음에 다른 물이 들고 있는 건 아닐까도 잠깐 생각했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라며 노력해 보자는 그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자신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의 얘기는 듣지 않겠다고 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시험에는 절대 나올 리 없는 그 모습이 너무도 선명히 남아있다.

어쩌자고 그렇게 밝은 대낮에 돌아선 걸까.

화창한 주말이었지만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으므로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닌가도 싶었다.

비로소 손을 놓아야 할 시기가 온 것뿐이다.

몇 년의 시간은 이젠 이미 지난 일이 되었다.

그는 '과거'였고 나는 당시 '현재' 수험생으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슬퍼하고 눈물 흘릴 시간에 강의 하나라도 더 듣고 책 한 장이라도 더 봐야지, 나는 수험생인데.

남자 친구 만날 시간에 앞으로는 강의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겠네, 문자하고 전화할 시간에 문제 하나 더 풀어 볼 수도 있겠네.

공부하는 사람은 생활이 단순해야 해.

곧바로 핸드폰 착, 발신 정지를 하고 동시에 속세와의 격리 생활에 돌입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던가 보다.

아니, 가장 슬프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울음을 토해냈는지도.

어쩌면 헤어질 날을 내내 기다려왔던 걸까?


할머니를 여의었, 그 사람도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사람들은 떠났고 드디어 내겐 '절박함'만이 남게 되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니?

공무원에 합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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