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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23. 2023

"여보 자?" 이 말이 제일 무서워

남편의 말

2023. 10. 20.

<사진 임자 = 글임자 >


"여보, 자?"

또 시작이다.

남편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안 자도 잔다.

눈을 더 질끈 감아야만 한다.

한밤 중에, 도대체 왜?


"자는 척하지 말고."

귀신같이 이젠 나의 속임수에 절대 안 넘어간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결혼 생활 10년이 넘어가면 남편은 아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능력이 다 생기는 법이다.

"100년 전부터 자고 있었는데 왜 그래?"

내 의사표시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지 말고."

포기를 모른다.

"그럼 저럴게. 나 자고 있으니까 말 좀 시키지 마."

한 번 말해서는 절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바로 남편이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집착도 심하다.

이럴 땐 대꾸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한번 봐봐. 진짜 세일 많이 해. 진짜야."

언제 어느 때고 세일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느냔 말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한밤 중에 굳이 나를 쿡쿡 찔러 댄 이유는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쇼핑병이 느닷없이 도져서(아니지,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지, 입도 안 삐뚤어졌으니 말도 똑바로 해야겠지?) 나를 끌여들이려고 했다.

"자기 만두 좋아하잖아. 이거 어때? 진짜 특가라니까."

내가 언제 만두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무관심하다 무관심하다 해도 나는 하지도 않은 말을, 평소 좋아하는 음식이 얼마 되지도 않은 입맛도 없고 도통 식욕도 없는 아내에게 저렇게 아무 말이나 하신다.

나는 그저 허기나 달래자고 어떤 음식을 먹었던 것뿐인데(그날은 만두가 있어서 만두를 먹었을 것이고 맹세코 사심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말한다.

"하여튼 너희 엄마 만두 진짜 좋아해. 너희 엄마는 장어탕을 좋아해. 진짜 수국 좋아해."

또 누구랑 헷갈리고 있는 거지?

도대체 그는 과거에 몇 명의 여자를 만났던 걸까?

저 중 어느 하나도 내게 해당되는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마구 갖다 붙이기 일쑤다.

그러니까 남편은 본인이 사고 싶으면

"너희 엄마 이거 좋아해."

이러면서, 단지 쇼핑을 위해 정당성(정당성을 얻기에도 그를 뒷받침할 근거가 미약함에도 불구하고)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집에서 필요도 없는 전지가위나 손전등, 우양산이 사고 싶어지면 이렇게 말문을 열곤 한다. 

"이거 아버님 갖다 드려."

이러면서 일단 저지르고 본다.

"당신도 블루투스 하나 놓고 써."

이러면서 나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주문에 들어간다.

이게 다 그놈의 세일 때문이다.

세일 기간에는 기필코 손톱깎이 하나라도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인 그는 그 기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는 그가 조기 퇴직을 하고 도매상이라도 차리는 줄 알았다.

아니 만물상에 더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은퇴 후를 대비하려는 건가?


신데렐라는 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지만 우리 집에 사는 어떤 성인 남성은 그때가 바로 쇼핑의 황금 시간대다.

옛날에는 호랑이, 호한, 마마,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가장 무서웠다지만 2023년을 사는 어떤 아내는

"여보, 자?"

라고 말하는 남편의 한마디가 가장 무섭다.

진저리가 다 쳐지도록 무섭다.

어머님이 도대체 태교를 어떻게 하신 걸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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