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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17. 2023

금지, 당할 때와 풀릴 때

신통방통한 어린이들

2023. 12. 14.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제 드디어 토요일이 되면 금지 풀린다."

며칠 전 갑자기 아들이 환희심에 넘쳐 외쳤다.

"그래? 벌써 그렇게 됐어?"

솔직히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마쳤으면서 나는 대꾸했다.

"응, 그래도 시간이 가긴 가네. 며칠만 더 참으면 돼."

이렇게 인내심이 있는 어린이라니!


"너희가 언제 금지당했지?"

진심으로, 나는 몰라서 물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걸핏하면(그러나 그 근거는 항상 타당했다) 너튜브 시청 금지를 당하는 초등 남매가 우리 집에 있다.

대개는 평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혹은 해야 할 일을 너무 늦은 시간에 하는 바람에 취침 시간을 늦춰서, 혹은 허용된 영상 시청 시간을 너무 넘기게 되면 '영상 시청 금지'라는 마법에 걸리고 만다.

물론 나도 너무 빡빡하게 굴지는 않는 편이다.(라고 자부한다.)

슬쩍 눈감아 줄 때도 있고, 저러다 또 금지당하지 싶으면 대놓고 미리 경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열 살, 열두 살  두 어린이들은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어른도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영상 매체의 늪에서 그런대로 약속한 시간을 잘 지키다가도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로그아웃 해야 할 때를 깜빡하곤 하는 것이다.

로그아웃 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모니터의 전원을 종료하는 어린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상 시청이라고 해봤자 매일 학습 삼아 보는 EBS 강의와 온 가족이 다 가입해서 하는 영어 사이트에서 하는 강의 그리고 하루 30분 정도의 너튜브 자유 시간,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뿐인 30분  정도의 게임 시간(뭔가 건수가 생기면 조금 더 시간이 늘어나기도 한다) 이게 전부다.

공부라는 명목 하에 강의 시청을 뺀 나머지 하루 30분의 자유 시청 시간을 아이들은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지 모른다. 1분 1초가 아까워 알람까지 맞춰놓고 칼같이 시작 시간을 지킨다. 그러나 끝나는 시간은 가끔 어영부영하다가(어쩔 땐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강한 의구심마저 들 때가 있다) 몇 분씩 늦어지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야박한 엄마는 아니므로.

그러니까 그 어린이들은 영상 시청 시작 시간에는 매우 엄격하고 마감 시간에는 아주 관대하시다.

시작할 땐 그렇지 않지만, 끝날 때는 융통성이란 것을 다 발휘하신다.

딸은 슬라임 관련 영상, 아들은 마술이나 과학 실험이나 종이접기, 3D펜으로 작품 만드는 영상, (내 눈엔 유치하기만 한) 해괴망측한 대결 등 대충 이런 것들을 즐겨 보고 있다.

으로 건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번에 내가 금지시켰을 게 분명하지만 당사자인 나도 잘 기억 못 하는 일을 아이들은 스스로 자백해서 자숙하는 시간을 가졌다.

"너희는 엄마가 몇 번 경고했는데 약속을 안 지켰어. 정말 여러 번 말했는데, 앞으로 일주일 간 너튜브 시청 금지야!"

이 말만 하면 둘이 알아서 날짜를 계산하고 자숙기간을 갖는 것이다.

, 참으로 양심적인 어린이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뭐, 괜찮아. 그럼 대신 책 보든지 하면 되지 뭐. 나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좋아. 나는 괜찮아, 엄마. 책 볼 시간도 더 많아지고 좋지 뭐."

이렇게 말하면서 왕오천축국전을 집어드는 10살 어린이가 한 명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어린이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것임을 이 엄마가 어찌 모르겠는가.

"우리 아들이 그렇게 생각해? 맞는 말이긴 하네.  혜초라는 스님이 쓴 책이지? 엄마도 아직 안 읽은 책인데 읽고 무슨 내용인지 좀 알려 줄래?"

비록 그 책이 만화책일지라도 아드님의 사기를 꺾어서는 아니 될 말이다.

"엄마가 어떻게 알아?"

"엄마도 초등학교 다녔어. 옛날에 다 배웠지. 근데 읽어보지는 않았어. 아무튼 재미있게 봐."

"알았어."

아들은 엄마에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화책을 볼 것이다.

나는 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한다.

결코 끝을 모르는 아들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스스로 절제하고 참고 기다리는 아이들이 내심 신통방통하다.


"엄마, 처음에 금지 됐을 때는 시간이 언제 가나 했는데 그래도 금지 풀리는 날이 오긴 온다, 그치?"

"그럼! 모든 일이 마찬가지야. 끝이 안 날 것 같아도 결국엔 다 끝이 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결국에는 끝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쁜 일이 있다고 항상 슬퍼하지 말고 좋은 일이 생겼다고 너무 자만하면 또 안돼.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거든. 시간은 항상 흐르고 있잖아."

"그래. 시간이 지나서 나중에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엄마는 70살도 더 넘네? 그럼 완전히 할머니가 되겠다. 그치, 엄마? 내가 70살이 되면 엄마는 100살도 더 넘고, 그럼 그때까지 엄마가 과연 살아 있을까?"

아드님, 또 너무 앞서 가시네요?

그 말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이지.

금지가 풀리는 날이 다가올수록 기쁨에 겨워 다소 말실수를 한 것이리라.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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