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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7. 2023

물에서 건져주는 게 아니었어

빛 지는 말 한마디

2023. 11. 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지금 바빠?"

"응. 무지 바빠."

"뭐 하는데?"

"아무튼 바빠.(=안 바빠도 바빠.)"

"그러지 말고. 진짜 바빠?"

"왜? 결론만 얘기해."


직감이 왔다.

분명히 또 내게 어떤 부탁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전화할 양반이 아니시다.


"옷걸이 아래쪽에 USB 같은 거 있거든. 그것 좀 찾아 줘."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문제의 그것을 찾았다.

"거기 폴더 한 번 열어 봐 봐."

"열었어."

"거기 있는 거 하나씩 불러줘 봐."

다시 그 양반의 아바타가 되어 폴더를 모두 열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 국어 교과서를 읽어보는 어린이처럼 또박또박 한 줄씩 읽어 내려갔다.

"거기서 그거랑 고거랑 그것 좀 나한테 메일로 보내줘."

일요일도 잊은 그 양반은 그날도 출근을 했다.

그런데 업무상 필요한 자료를 집에 두고 가서 급히 나를 찾은 것이다.

주말에도 못 쉬고 출근한 사람도 있는데 집에서 그 정도 심부름은 해줘야 마땅하지.

나는 기꺼이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그 양반은 컴백홈 했다.

"이제 출발해."

이러면서 미리 스케줄을 알리며 내가 다음 절차에 들어가게 했다.

"알았어. 밥 차리라고?"

고생하며 일하는데 밤 12시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밥은 차려 내야지.

"근데 이발은 언제 할 거야? 가기 전에 하라니까."

또 이발할  때가 되었다.

아들은 아침 일찍 끝냈고, 그 양반도 내친김에 해치우려고 했는데 피곤하다고 자꾸 미루는 통에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밤 중에 이발이라니, 그것도 일요일 밤에.

쉬지도 못하고 일하고 오셨는데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해 줘야지.

내 몸이 요즘 안 좋아서 그런지 그날따라 이발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아쉬운 마음은 나만 간직하기로 한다.

연일 이어지는 늦은 퇴근으로 피로가 쌓인 탓인지 다행히 그 양반은 그날의 참사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럭저럭 일요일 밤이 무사히 지나가나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양반이 정색하며 말했다.

"근데 아까 내 USB 쓰고 어디다 놔뒀어? 갖다 놨어?"

"아니. 책상에 있는데."

"갖다 놔야지. 왜 안 갖다 놔? 지금 당장 갖다 놔."

"내가 일부러 안 갖다 놨어? 깜빡했지."

"그런 걸 깜빡하면 어떡해. 나중에 쓰려고 찾을 때 없으면 어쩌라고? 당장 갖다 놔!"

"그게 어디 가? 갖다 두면 될 거 아냐!"

"지금 당장 빨리!"

USB 그거 먹지도 못하는 거, 어디 내다 팔지도 못하는 거, 책상에서 방까지의 거리가 이역만리도 아니고 서 너 발만 떼면 닿는 거리인데 누가 그거 떼어먹을까 봐 그렇게 닦달을 해대다니. 그렇게 말하는 시간에 나 같으면 직접 가져갔겠다.

닦달의 차원을 넘어 내게 화를 내려고까지 했다.

게다가 비약은 또 어찌나 심하신지.

내가 몰래 쓰고 숨겨 놓은 것도 아니고 순전히 본인이 부탁해서 시킨 대로 일을 한 것뿐인데, 그리고 갖다 두는 것을 깜빡한 것뿐인데.

양반이 은혜를 막말로 갚으려고 하네?

어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기분 나쁘게 할까.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근데 케이스는 왜 여기 있어? 케이스랑 같이 가져가서 쓰고 담아놨어야지."

"필요한 것만 가져가서 쓰고 갖다 놓으면 되지 케이스까지 뭐 하러 가져 가?"

"그걸 같이 챙겼어야지."

"USB만 챙겨서 자료만 전송하면 되지 케이스로 뭐 하게? 거긴 아무것도 안 들어있잖아."

"그래도 세트로 같이 가져갔어야지."

이 인간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왜 엉뚱한 케이스 가지고 또 트집이람?

알맹이만 빼서 쓰고 다시 그 안에 넣어두려고 했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깜빡했다니까 그러네 자꾸.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이지 왜 애먼 케이스 가지고 다 트집이야.

하긴 며느리가 미우면 뭐도 미워 보인다더라마는.

그러면 심부름을 시키지 말든지.

아쉬울 땐 당장 전화해서 부탁하고 볼일 다 봤으니까 막 나가자는 건가.

가만, 내가 자료를 메일로 전송씩이나 해줬는데 그 양반이 내게 고맙다고 말은 했던가?

그런 말을 듣자고 한 일은 아니지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태도가 글렀다.

"거기 중요한 자료 있으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그러니까 생각날 때 지금 좀 갖다 줄래?"

라고, 만에 하나, 행여라도 저렇게 말했다면

"중요한 거면 잘 관리해야지. 내가 잘못했어. 바로 제 자리에 갖다 놨어야 하는 건데."

이 정도의 말은 눈 한번 질끈 감고 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말인지 막걸리인지도 모르겠는 말을 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정말.

아무리 요즘 일에 치어 고생한다고 해도, 오냐오냐 다 받아줬더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다.

그런 말 들어 봤을 거야.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거.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은 못 갚을 망정 마이너스 대출은 받지 말아야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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