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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6. 2023

술알못의 난생처음 맥주 심부름

잘못된 하청

2023. 11. 5.

<사진 임자 = 글임자 >


"오늘 나갈 거야?

"이따가 봐서. 왜?"

"아니."

"맥주 사달라고? 사 올게. 뭐 사 오면 돼?"


거의 매일 자정에 퇴근하다시피 하는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맥주 한 잔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늦은 밤 귀가해서 냉장고 문을 열면 반가운 그것이 그를 반기도록 한쪽을 가득 채워놓고 싶었으나...

난 술을 모른다.

맥주를 모른다.

술맛을 모른다.

맛있는 줄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어떤 것으로 사야 할지를 모른다.

그 술맛이 알고 싶지 않다


"근데 무슨 맥주로 사야 돼?"

"그냥 아무 거나 사 와."

아무 거나라니!

세상에 이처럼 무책임하며 극악무도하기까지 한 무성의한 대답이 또 있다더냐.

"아무 거나라는 맥주도 있어? 처음 들어보는데?"

"그냥 아무 거나 골라 오라고."

"내가 모르니까 그렇지. 술을 마셔봤어야 알지."

"상관없어. 내가 언제 뭐 따져서 먹었어?"

"그럼 정말 아무거나 사 온다."

맥주도 마셔 본 놈이 잘 산다.

안 마셔본 놈은 눈앞에 있어도 고를 줄 모른다.

나에게 있어 맥주란, 그저 다 보리로 만든 알코올음료다.(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그 쓰린 마음을 달래줄 신통방통한 액체를 구입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주말 저녁 길을 나섰다.

"당신은 맥주 살 줄 모르니까 내가 보내 줄게. 그걸로 사다 줘."

역시, 나를 못 미더워했다.

집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마트에 갔다.

살 마음이 없었을 때는 여기저기 맥주가 걸리적거리게 있더니 그날따라 눈에 안 보인다.

남편이 보내 준 사진은 태어나서 처음 본 맥주들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곳에 남편이 요청한 맥주가 다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4개 중에 2개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름이 앞부분만 같고 뒷부분은 다른 맥주였다.


"여기에 그 맥주 없는데?"

심부름꾼은 당장 원청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없긴 왜 없어? 잘 찾아봐."

원청업자는 한숨까지 쉬며 심부름꾼을 나무랐다.

"없으니까 없다고 하지."

"당신이 아마 잘 못 찾아서 그럴 거야. 잘 봐봐."

"계속 뒤졌는데 없어. 이상하다. 다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전에 가서 보니까 다 있던데 왜 없다고 그래?"

"잘 찾아봤어. 근데 없어. 이젠 더 이상 안 들여놓나 보지 뭐."

"알았어. 그럼 그냥 편의점 가서 사다 줘. 4개에 만원 하는 그런 거 있을 거야."

"알았어."


미련 없이 첫 번째 마트에서 나와 두 번째 목표물로 향했다.

그날도 나의 명품 쇼핑 카트와 함께였다.

잘은 모르지만 맥주를 4개씩이나 사려면 제법 무거우리란 예상은 할 수 있었으니까.

편의점도 마찬가지였다.

꼬부랑글씨로 요망하고 해괴망측하게 적힌 각종 맥주가 넘쳐났다.

그런데 또 안 보인다.

도대체 남편은 그런 맥주를 어디서 본 거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기도 없는데?"

"없긴 왜 없어? 내가 거기서 몇 번이나 샀는데?"

"진짜 없어. 딱 한 가지밖에 없어."

"제대로 간 거 맞아? 어디로 갔어?"

"집 앞에."

"거기 맥주 있는 곳이 두 군데인가 있을 거야. 잘 봐봐."

"거기도 다 봤어."

"없을 리가 없는데, 어휴."

눈에 익지 않으니 있는 맥주도 안보였다.

"그냥 아무 거나 사와, 골고루."

뭘 알아야 골고루 사더라도 살 것이 아닌가.

그게 더 어려웠다.

기원전 5,000년 경에 알코올을 입에 대 본 것처럼 까마득한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도 술잔만 입에 댔다 떼는 수준의 내겐 그처럼 어려운 심부름이 없었다.

그 맛도 없는 맥주를 뭐 하러 마시는지 모르겠다.


마침내 심혈을 기울여 자그마치 4개의 캔을 집어 들었다.

4개에는 4500원이지만 4캔에는 12,000원이라는데 달랑 한 개만 사면 그건 무기징역감이었으므로.

어린 두 것들을 남겨놓고 징역살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최근에 또 다른 심부름을 남편으로부터 하청 받은 일이 있었다.

"나 매운 새우과자가 먹고 싶은데 사다 줄 수 있어?"

"혹시 임신했어? 그럼 먹어야지. 사다 줄게, 걱정 마."

이러면서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가 그에게 갖다 바친 것은 엉뚱하게도 '매운 새우과자 블랙'이었다.

"매운 거 사달라니까 까만 거 사 왔네."

"어? 진짜네? 난 매운 거 산다고 샀는데. 이상하다, 뭐에 씌웠나 보다."

한글을 아는데 엉뚱한 걸 집어 온 적이 있었다.

잘못 사 왔다고 나를 타박하긴 했지만 그날 밤이 다 새기도 전에 남편이 나 보란 듯이 그 한 봉지를 거의 다 비워버렸음은 물론이다.  

과자 심부름 하나도 제대로 못한 나에 대한 복수였을까?

주말 저녁에 맥주를 사러 갔다가 그날 일이 떠올라 그가 간절히 원해 마지않았던 '매운 새우과자' 한 봉지를 과감히 사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왜 있는 것도 못 찾아? 그게 왜 안 보여?! 아무리 술을 모른다고 그것도 못 찾아?"

라며 내게 혀를 끌끌 차는 남편의 말을 듣고는 과자 코너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론.

일종의 소심한 복수였다.


안주도 없이 맥주만 홀짝홀짝 들이켜라, 밤새도록.

그리고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기 술은 자기가 사 먹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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