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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8. 2023

그 약 때문일지도 몰라

약을 조심해야 해

2023. 10. 29.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 약 좀 발라 줄래?"

"또?"

"얼른 발라줘."

"내가 말한 그 약이 난 좋던데. 붙이고 자면 밤새 붙어서 덜 아프고 금방 낫는 것 같던데."

"이거나 발라 줘."

강력한 효과만큼 단 한 번의 가벼운 터치로도 몸서리를 칠 만큼 찰나의 고통이 찾아온다.

남편은 잠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안정을 찾았다.


그날의 귀가 시간은 상당히 양호했다

밤 11시 이전이었다.

또 입안이 헐었다고 했다.

그렇게 밤늦도록 일만 하는데 병이 안 나고 배기겠나.

최근에도 입안이 헐었다며 도저히 자기 손으로는 약을 못 바르겠으니 나보고 대신 발라달라고 했다.

새까만 것도 새빨간 것도 아닌, 입안이 헌 데는 직방이라는 칠을 하는 그 약을 내게 내밀었다.

갑자기 2009년의 그 여름날이 생각났다.


"임자씨, 내가 써 본 약 중에 입안이 헐었을 때 바르면 바로 낫는 약이 있는데 하나 사줄게요."

첫 만남의 자리였다.

나는 괜찮다는데 굳이 계속 만나자고 만나자고 조르던 철없는 공시생이 내게 작업을 걸어왔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도 나의 병을 담보로, 약품을 미끼로 말이다.

"뭘 발라도 잘 안 나아요. 요즘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요. 푹 쉬면 낫겠죠 뭐."

나 한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던(물론 내가 느끼기에만) 그 젊은이를 나는 산으로 불러들였고, 차라리 먹이지 말았더라면 좋을 음식을 먹였고, 산 언저리를 한 바퀴 휙 돌다가 내려왔을 때였다.

내가 입안이 헐어서 고생 중이라고 하자 그 공시생은 다짜고짜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근처에 약국 있어요? 진짜 좋은 약 아는데."

얼마나 자신 있어하던지 처음 보는 외간남자의 추진력에 그만 나는 압도당해 버렸다.

이 인간이 처음 보는 여자한테 무슨 약을 쓰시려고 그러시나?

이 사람 이거 공시생이 아니라 약장수였나?

우리 엄마가 모르는 사람하고 말하지 말랬는데 말을 해버렸다, 그것도 온라인상에서.

자고로 모르는 남자는 조심해야 했는데 만나버렸다, 그것도 산속에서.

언제 봤다고 처음 만나는 외간남자에게 도시락까지 바쳤다, 그것도 김밥으로, 손수 말아서.

"그런 약이 있어요? 옳아메디 써 봐도 잘 안 듣던데?"

피차 처음 보는 사람끼리 약간의 경계를 하면서, 조금은 미심쩍어하면서 우린 내외하듯 몇 발짝씩 떨어져 약국에 들어갔다.

"이거 진짜 신기하다. 정말 금방 나았어요."

이러면서 며칠 후 호들갑스럽게 그의 공을 한껏 드높였음은 물론이다.

서른 해를 살면서 그 좋은 약의 존재를 몰랐었다니,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 약도 옛날 그 약발이 아니다.

다 변했다.

그 약도, 그 공시생도.

가끔 내게도 구내염이 생기는데 발라도 덧발라도 잘 낫지 않고 증상이 오래간다.

그이가 어느새 그 인간으로 변해버렸다.(고 느껴지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일까?)

하필, 왜 그날 그 약은 나한테 사줘 가지고...

내가 그 약만 안 발랐어도.

아니지, 완쾌한 다음에 깔끔하게 정리했었더라면.

오늘날 이렇게 남편에게 그 약을 발라주려고 그날 약국에 갔던가 보다.

다음 생을 준비하며 다짐해 본다.

다음번에도 외간남자를 만날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최소한 구내염 따위가 발병하지 않은 길일을 택하리.

몸이 아프면 사리분별능력도 떨어지기 마련일 테니까.

아플 때 잘해주면 평생 남는다던데, 설마가 결혼까지 성사시켜 버렸다.

평생 남으면, 또 이를 어째?

오늘은 내가 효과를 본 약을 구하러 나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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