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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9. 2023

세심한 건가 단지 습관일 뿐인가

그때는 몰랐지만

2023. 11.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영양제가 너무 많은 거 아냐?"

"많긴 뭐가 많다고 그래?"

"진짜 너무 많다. 저렇게 무조건 많이 먹는 것도 안 좋다고 하던데."

"다 필요한 거야."


그 옛날 남편을 처음 만났던 날, 구내염에 시달리는 내게 특약처방을 내리고 약국에서 '구내염의 묘약'을 한 병 사줄 때만 해도 나는 그 사람이 정말 세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생각하는 것과 사실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렇게 영양제 많이 먹는 사람도 아마 없을 거야."

"우리가 음식으로 다 섭취 못하니까 이렇게라도 챙겨 먹어야 해. 의사들은 하루에 몇 십 알씩 먹는다잖아. 의사가 왜 그렇게 많이 먹겠어."

"그래도 적당히 먹어야지. 약도 서로 상충되는 게 있을 수 있는데 아무리 좋은 약도 잘 따져보고 먹어야지 무작정 많이만 먹는다고 좋은 게 아닐 텐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는 의사도 아니잖아.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이고. 자기 체질에 맞게 먹어야지."

"다 괜찮아."

"그리고 뭘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사? 다 먹고 나면 사든지 하지. 싸다고 무조건 많이 사지 말라니까. 나중에 결국 다 못 먹고 유통기한 다 돼서 버리는 거 분명히 있을걸?"

약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영양제의 '영'자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무모하게 많이만 먹는다고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남편은 정말 영양제의 힘으로 살고 있다.(고 특히 요즘에 절실히 느낀다.)

오메가 3, 비타민(가루와 알약), 간 영양제, 숙취해소제, 비상 감기약 등등 넘쳐나는 약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내가 휴직 중에 세어 본 적이 있었다.

약통만 해서 서른 개가 넘었던가?

남편은 항상 말한다. 비상용이라고.

대비하는 거라고 했다, 도대체 무엇을?


"친구한테 물어봐봐. 이렇게 무분별하게 다 먹어도 되는지."

"괜찮다니까."

남편에게는 약사 친구가 있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지만 내가 연락처만 안다면 눈 한번 질끈 감고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약에 문외한인 나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랜만에 남편과 통화를 하더니 어린이 유산균과 어른용 비타민을 한 상자나 보내왔다.

언젠가 직원들에게 내가 말했다.

"남편이 영양제를 너무 많이 샀어. 별 걸 다 먹어. 좀 지나친 것 같아."

대충 어떤 종류의 약을 먹는지 얘기하자 한 직원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몸에 좋다고 마구 먹으면 안 되는데."

"내 말이."

"죽을 때 금방 안 죽는대. 고생한대. 아무튼 적당히 먹어야 돼."

그의 말인즉, 몸에 좋다고 너무 많이 먹어 두면 갈 때(?) 힘들다는 것이다.

벌써 내가 그런 걸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어디서 그런 비슷한 말을 들을 것도 같았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니까.


어느 순간 선반에 잔뜩 쌓여있는 약병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침 유통 기한도 임박해 오고 있었다.

남편이 출근한 사이, 하루에 한 병씩 야금야금 없애버렸다.

양심상 유통기한이 서 너 달 남은 것은 일단 남겨두기로 했다.

몇 개쯤 사라졌어도 남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그 수가 많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영양제를 잔뜩 사놓고 (쟁여놓기에만 의미를 둔 것이었는지)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꾸준히 먹는 것은(=생각날 때 한 번씩) 비타민 정도랄까?

나머지는 장식용일 뿐인 것 같았다, 내 눈에는.

또 돈 주고 쓰레기를 샀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전히 선반에 가득 찬 영양제들이 있다.

하루는 남편이 먼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세상에. 이거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네. 아깝다. 버려야겠다."

"그것만 있는 줄 알아? 여기도 몇 통이나 있어. 그러게 뭐 하러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사냐고?"

야금야금 버리다가 일종의 충격요법에 쓸 요량으로 아껴 둔 것을 내밀었다.

자그마치 2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뚜껑을 열자 금상첨화로 내용물이 변색되고 냄새도 났었다.

"벌써 이렇게 많이 지났어? 몰랐네."

남편도 깜짝 놀랐다.

남편의 취미는 아마도 영양제 수집이었던가 보다.

"제발, 필요한 것만 신중히 사."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진짜 아깝다."

이렇게 하나마나 한 소리만 연신 했다.


법 없이도 못 사는 양반이지만, 영양제 없이는 더욱더 못 사는 그 양반,

그는 과연 섭취하기 위해 영양제를 사는 것인가 버리기 위해 사는 것인가.

그런데 가만,

옛날에 나 약 사준 것도 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양반은 약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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