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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10. 2023

너에겐 일등이 중요하지

그 부산물은 더 중요하고

2023. 11.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우리 아들이 오늘도 엄마한테 연락도 안 하고 놀고 오셨네."

"엄마. 미안해. 하지만 이걸 보면 엄마 기분이 풀릴 거야."


아들이 자랑스럽게 종이가방을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역시, 아들은 나를 잘 안다.


"엄마, 반에서 컵 쌓기 대회를 하는데 거기서 일등을 하면 선물이 있대."

"그래서 또 일등 하려고?"

"당연하지. 내가 열심히 연습해서 일등 할 거야."

"그래. 하고 싶으면 도전해 봐. 진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우리 반 신기록이야. 근데 2등이 나를 곧 따라잡으려고 해."

"그 친구도 연습 많이 하나 보다."

"그런가 봐. 그래서 말인데... 나 컵 좀 사주세요."

"컵까지 사서 연습해야 돼? 그냥 종이컵으로 연습하면 안 돼?"

"진짜 컵으로 연습을 해야 실제로 할 때도 잘할 수 있지."

"그렇긴 하겠다."

그리하여 아들은 그다음 날 컵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잠깐의 대회를 위해 굳이 컵을 살 필요가 있겠냐 싶었지만 아들이 워낙 강하게 그 필요성을 주장했으므로 나도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잠깐 쓰고 이내 천덕꾸러기가 될까 봐, 짐이 되는 것이 싫어 가능하면 안 사고 싶었지만 아들은 뭐든지 '연습도 실전처럼' 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다.


컵이 도착한 그날 저녁부터 (거짓말 좀 보태서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컵 쌓기에 열을 올렸다.

정말 한다면 하는 어린이, 의지의 화신인가, 집념의 결정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무모한 집착의 아이콘인가.

옆에서 볼 때 가끔 너무 한 가지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것을 생각 못하고 너무 거기에만 빠지는 것 같은 느낌에 좀 염려스러울 때가 있다.

아들은 무엇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다른 건 눈에도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아침에도 내게 일찍 깨워달라고 부탁을 하고 컵 쌓기 연습을 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셨다.

"저런 집중력으로 공부를 하면 뭔가 해도 하겠는데 말이야."

아침에 출근하려다 말고 남편이 아들을 보며 내게만 가만 속삭였다.

"그러게. 저런 거 보면 진짜 집중력 하나는 대단해. 날 닮아서 그런지."

나도 맞장구 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러네. 나 닮았다니까."

남편도 지지 않고 출근은 뒷전이고 아들이 얼마나 자신을 닮았는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아휴, 엄마 아빠 또 시작하네. 내가 집중을 잘하는 거지."

아들이 컵을 쌓다 말고 한마디 하셨다.


"엄마, 오늘도 내가 일등 했어. 이대로만 하면 대회 때 내가 정말 일등 할 수도 있겠어. 오늘 신기록은 4.2초야."

12개의 컵을 가지고 요리조리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정리했다고 흩트렸다가 재주를 부리며 아들은 매일 연습에 매진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같기도 했다. 저기다가 동전만 밑에 넣으면 옛날 시장 바닥에서 흔하게 보던 그런 광경일 것이다. 그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돈 넣고 돈 먹기'라고 한다지 아마?

아들의 현란한 손놀림에 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매일 연습을 하느라 우리 집 멤버들은 아들의 관람객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신기한 것도 한두 번이고 신통방통한 재주도 하루 이틀이지 솔직히 나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른 일 하면 안 될까? 할 일도 많은데. 할 때마다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엄마. 엄마는 아들이 컵 쌓기 일등 해보겠다는데 이렇게 협조를 안 해줄 거야? 집중 좀 하고 잘 봐봐."

라며 타박하는 소리를 종종 아들에게 들었음은 물론이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꼭 일등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재미로 해보는 거지 그렇게까지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 이거지.

어서 빨리 그 대회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엄마, 오늘 드디어 내가 일등을 했어! 그동안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

"역시, 우리 아들이 해냈구나. 그렇게 연습 많이 하더니 정말 좋겠다."

"응, 근데 선생님이 선물을 준비 못했다고 내일 주신대. 기대해."

정말 일등을 차지하고 하교한 아들이 그렇게 기세등등해 보일 수가 없었다.

크게 될 아이야, 장차.

뭘로 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엄마, 선생님이 오늘 안 오셨어. 그래서 선물 못 받았어."

코로나에 걸려서 지난주 목요일부터 병가를 내셨다고 했다.

"학교 오시면 주시겠지. 기다려 봐."

금요일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돌아왔지만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엄마, 선생님이 다 잊어버리신 거 아닐까?"

"설마? 기억하고 계실 거야. 기다려 보자."

내가 다 초조해졌다.

정말 아들 말마따나 며칠 집에 계시다 깜빡하고 계시면 이를 어쩐다?

아들이 그렇게 컵 쌓기에 집착 한 이유가 뭐였는데?

과연 어떤 선물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무턱대고 기대만발인 아들이 여간 실망한 눈치가 아니었다.

선생님께 컵 쌓기 대회의 보상을 잊으신 건 아니냐고 문자라도 보내야 하나? 주책맞은 생각까지 다 했다.

나라면 기원전 2,000년 경에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마침내 화요일 하굣길에 (비록 친구들과 친교활동에 열을 올리느라 많이 늦으시긴 했지만) 노력의 결과물을, 일등의 보상물을 잔뜩 들고 왔다.

과자 종류였는데 생각보다 푸짐했다.

"엄마, 봐봐. 열심히 노력하니까 일등도 하고 이렇게 선물도 많이 받잖아. 어때? 컵까지 사서 연습한 보람이 있지? 여기서 엄마가 먹고 싶은 과자 골라봐요. 특별히 엄마한테는 두 개 줄게요."

"The winner takes it all~"

이라고 아바는 노래했고

"노력해서 일등 하면 이렇게 선물도 많이 받을 수 있어."

라고 아들은 콧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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