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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16. 2023

고3 수능보다 초3 영단어 시험

신통방통한 초3

2023. 11. 15.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잠깐. 자기 전에 공부 좀 하고 잘래."

"아니야. 9시 반이 넘었어. 이제 잘 시간이야. 내일 해."

"잠깐이면 돼. 5분 정도만."

"그러다 자는 시간 늦어져서 안돼. 자는 게 중요하지 지금 공부할 시간 아니야. 공부는 안 하더라도 잠은 자야지, 어린이가."


엄마와 아들이 바뀐 것이 아니다 결코.

아들은 엊그제 밤에도 자기 전에 영어 단어 몇 개라도 써보겠다고 했고 엄마는 한 밤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어서 잠들라고 재촉했다.

대개가 이런 식이다.

공부하려는 자와 그런 그를 막는 자, 우리는 엄마와 아들 사이이다.


"엄마, 목요일에 영어 단어 시험 본대. 1부터 20까지 시험 봐."

"어떡해, 하루 밖에 안 남았잖아. 시간이 없는데."

"이번주 목요일이 아니라 다음 주 목요일이니까 아직 시간 있어. 걱정하지 마."

"물론 엄마는 걱정 안 하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하루 전에 선생님이 알려주실 리가 없는데 말이야."

지난주 수요일에 아들과 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수능 시험일이 오늘로 다가왔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아들의 영단어 시험 날짜도 같은 날이다.

"엄마 다음 주 목요일이 수능이래. 그날 나도 영어 단어 시험 보는 거야."

"그래? 벌써 수능이 내일모레네. 근데 우리 아들이 수능 날짜도 다 알아?"

"그럼! 당연하지.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

"그렇구나. 대단하다. 우리 아들이 그런 것도 다 알고."

"내가 다 알지. 근데 엄마, 수능이 뭐야?"

수능 날짜는 알지만 정작 수능이 뭔지는 모르는 열 살의 수능 겉핥기.

"대학교에 갈 학생들이 보는 시험이야. 수학능력시험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데. 또 옛날 생각나네. 너희 큰 외삼촌이 수능을 처음으로 치른 세대거든. 처음 수능 본다고 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수학능력시험이라고 해서 '수학' 시험만 보는 줄 알고 말이야. 엄마가 수학엔 약했거든. 그래서 난 이제 대학은 다 갔다 이랬다니까."

"하여튼, 엄마도 참."

"아무튼 다행이지 뭐야. 수학만 시험 봤더라면 정말 엄마는 대학 갈 꿈도 못 꿨을 거야. 뭐 대학을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랬군."

"너희가 앞으로 수능을 볼지 안 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나는 이렇게 불쑥, 뜬금없는 고해성사를 아이들 앞에서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맞장구를 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한다.


"수능은 남의 일이고 당장 우리 아들 영어 시험이 다음 주네. 근데 1부터 20까지 다 알아?"

"당연히 모르지."

"그래. 모르면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엄마가 알려줘."

"알았어. 모르는 거 있으면 엄마한테 물어봐."

언제나 아들과 나의 대화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오랜만에 밤 10시 이전에 일찍 퇴근한 직장인이 눈치 없이 또 끼어들었다.

"에이, 안돼! 너의 엄마 발음이 안 좋아서."

피곤하다면서 얼른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왜 굳이 끼느냔 말이다.

"걱정하지 마. 스펠링은 내가 알려 주고 발음은 찾아서 들어보면 돼."

나도 다 계획이란 게 있는데,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시나?

"우리 때는 그런 것도 시험 안 봤는데 요즘 애들은 나때랑 다르네."

그래봤자 제 동생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면서 느닷없이 딸이 '라테'를 한 잔 만들었다.


내가 시작하자는 말도 안 했는데 아들이 갑자기 백지를 들고 와서 1부터 영어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3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엄마, 3이 뭐지? 어떻게 쓰더라?"

"그냥 쓰기만 하지 말고 말로 하면서 써 봐. 그러면 더 기억이 잘 날 거야. 발음을 생각해."

"어떻게 말하더라?"

물론 아들이 전부를 다 아는 것은 아니라고 고백한 후였으므로 놀랍지는 않았다.

갑자기 아들이 거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히히, 비장의 무기가 있지. 이럴 줄 알고 내가 다 적어 놨어."

세상에 만상에.

손바닥만 한 수첩에 영단어가 가득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준비성이 철저하다'라고 한다지 아마?

그래, 1과 2까지 아는 것만도 어디냐.

"근데 20까지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괜찮겠어?"

"아니야, 엄마. 13부터는 뒤에 '틴(teen)이 붙어. 19까지 그렇게 돼. 그러니까 안 어려워."

"우와, 우리 아들이 그런 규칙성을 다 알아냈어?"

"그럼, 내가 다 알지. 보니까 그렇더라고."

"대단한데? 맞아, 13부터는 뒤에 그게 붙으니까 외우는 건 쉬울 거야. 외국에서는 '틴(teen)'이 붙는 13부터 19까지가 십 대에 해당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우리는 10살이 넘어가면 그냥 십 대라고 생각하잖아. 우리랑은 좀 다르지? 그러니까 10대 개념이 외국이 더 좀 좁을지도 몰라. 그래서 어쩔 땐 헷갈리더라니까. 그리고 틴이 붙으면 강세가 뒤에 있다고 하더라, 좀 더 길게 발음되고. 13 하고 30 하고 구분할 때 발음을 그렇게 구분하면 된대. 모를 땐 비슷하게 들리더니 알고 들으니까 정말 그게 다르게 들리더라, 엄마는. 그래서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나 봐. 그냥 참고만 해. "

"진짜 그렇네. 나 벌써 다 외운 것 같아."


수능 치르는 고3보다 더 학구열에 불타는 초3이 우리 집에 산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쩐다니?

엄마는 안 닮았네?

아빠도 안 닮은 것 같은데?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엄마를 더 닮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만 흐뭇해했다.)

겨우 초등 3학년인데 영단어 쪽지 시험에도 이렇게나 열성을 보이는데 고3이 되면 어떨까?

또 지레 긴장한다.

언제 질풍노도의 길로 들어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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