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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23. 2023

남의 편에겐 얼마만큼의 마늘이 필요한가

인간이 조심해야 할 것은 개조심이 아니라 '말조심'

2023. 6. 3.

<사진 임자 = 글임자 >


"사람 되려면 아직 멀었어. 언제 사람 될래? 아직 멀었어."


라고,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선수 쳐서 하는 '인간'이 한 명 우리 집에 거주하고 있다.

그것도 두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내가 보기엔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 같다.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말 못 할 것 같다, 나라면. 생각이란 걸 하기나 하는 걸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과연 저것은 마흔씩이나 먹은 '인간'이 아내라는 사람에게 할 법한 소리인가?

상식적으로 가정 안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가?

한 두 번이 아니라 이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결코.

사람이 아니면  그럼, 내가 귀신인건가?

어휴, 그랬으면 내가 진작에 잡아갔지, 이 '인간'아.

귀신은 저런 인간들 잡아가라고 있는 거니까.


3 아승지겁의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전 세계의 마늘을 다 싹쓸이한다 해도, 누구는 사람이 되긴 글렀다.(고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솔직히.)

굳이 예를 들자면, 바로 저런 상황 말이다.

나는 개차반도 아니고, 망나니도 아니고, 더군다나 저런 말을 들을 짓 같은 것은 안 하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따위의 막말을 하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내에게 저런 말을 하는 '인간'이

"사람들이 내가 가정적이고 공감도 잘해 줄 것 같다고 하더라."

라고 내 앞에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을 할 때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이 '인간'이 밖에서는 어떤 탈을 쓰고 다니는 거지?

그 '인간'이 내게 하는 말과 행동을 그 순진한 사람들이 본다면, 그러고도 그런 망언을 할 수 있을까? 이래서 부부 사이의 일은 둘만 아는 것이다. 안 살아보고 섣불리 지레짐작할 일도 아니요,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 함부로 말할 일도 아니다.

상상조차 못했던 말을 들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니다.

나는 그 '인간'과 살면서 그전에는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들을 일도 없었던  몹쓸 말도 들었고 해괴망측한 일들도 많이 당했다.

그것도 아이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말이다.

아이들은 보고 들은 대로 배운다던데...

그럼 혹시 보고 배우셨나?

이런 방정맞은 생각까지 다 들었다.

전혀 상관없을지도 모를 일을 또 상상하게 된다.

진실은 당사자만 알겠지.

그리고 번듯한 부모에게서도 그렇지 않은 자식이 나올 수 있고, 멀쩡하지 않은 부모에게서도 번듯한 자식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니까.

연관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다.

설마, 그렇진 않았겠지.

그 '인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를 일이겠지.

과거는 묻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만 얘기해야겠다.

저따위의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장차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그 '인간'의 말을 적당히 흘려듣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은 과연 저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

불만이 있으면 불만을 얘기하면 될 것이지, 그게 나의 사람됨과 아님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저런 말이 감히 집안에서 나올 법한 것인지 처음엔 너무 충격적이었다.

내가 남의 물건을 훔치길 했나, 사람을 때리기를 했나, 사회악을 저지르길 했나, 그것도 아니면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해서 뉴스에 나오기라도 했나.

그 '인간' 혼자 분에 겨워 그런 말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둘이 티격태격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뜬금없고 황당하고 상식이하이고 기본도 안 됐다.(고 나만 또 혼자 생각했다.)

최대한 같이 있는 시간을 줄여야지,

말도 최대한 섞지 말아야지,

저런 참사의 현장을 아이들이 목격하지 않게 가능하면 한자리에 있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다짐해도 어쩌다 보면 얼떨결에 둘이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어리석게도 그 '인간'하고 길게 얘기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저렇게 말인지 막걸리인지도 모를, 함부로 하는 막말을 내가 들을 이유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다.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끝내는 모를 '인간'이 그 인간 아닐까 싶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다른 집도 이런 식의 말을 상대방이 하는지 주위에 물어봤으나 다들 황당하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었다. 적어도 그런 말은, 싸워도 특히 애들 앞에서는 안 한다고.

나의 부모님도 티격태격하시긴 했지만 절대 거친 말이 오가거나 막말을 하신 적은 없었다. 최소한 내 앞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두 분이 싸워도 나는 별 신경을 안 썼고, 싸움은 고작 말싸움이 다였고 길어야 몇십 초였다. 참으로 짧았다. 싸움이라기보다 서로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그에 비하면  그 '인간'과 나는 어쩔 땐...

내가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대꾸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요, 대꾸하는 나까지 수준 이하의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마음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어째서 피한다고 했더라?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고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고 살 수 있을까마는 적어도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특히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한번 생각한 후에 말이다.

증거자료 백만 스물세 번째로 채택한다.


나도 항상 고운 말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특히 아이들 앞에서는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말이 있다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왔다.

그 '인간'이 나에게 불만이 많다는 것을 잘 안다.

특히 내가 작년에 일을 그만둔 이후로 더한 것 같다.(고 나는 느껴왔다.)

나는 그 '인간'에게 더는 불만이라느니, 기대라느니, 이런 말 자체가 사치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을 말, 해서는 안될 말,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정작 모르는 것일까.

내가 말을 할 줄 몰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한 마디만 하기로 결심했다.


인연 없는 중생은 구제하기 어렵다 하셨나니.

그저 몸에 좋다는 햇마늘을 요리해 줄 뿐이다.

"많이 잡솨. 그래야 사람 되지."

진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말만 한다.

한 번쯤은 나도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서다.

오죽했으면, 오죽했으면.

곰은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지만, 짐승도 사람이 될 수 있다는데, 그 '인간'도 정말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할 말, 안 할 말을 구분할 줄은 아는 '사람'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생각했다.

톨스토이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소설 제목으로 이렇게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종종 생각한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에 버금가는 '남의 편에게 얼마만큼의 마늘이 필요한가'.

아니,

그보다 먼저 모든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대화 자체는 분별의 도구라고 하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익하지 않을 때는 침묵을...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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