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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28. 2023

아빠는 빵점, 엄마는 백점

보고도 믿기 힘든 점수

2023. 11. 26.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100점이네. 아빠는 빵점이었는데."

딸과 아들 둘 다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우리 집 한 멤버가 강력히 외쳤다.

"기계는 거짓말 안 해. 저거 맞게 나온 거야."

솔직히,

정말 기계는 거짓말 못하는 존재 아닌가?

(라고 믿고만 싶은 멤버가 있었다.)


"아빠, 아빠 빵점이야 빵점. 어떻게 빵점이 나올 수 있지?"

처음 그 점수를 보고 딸이 신기해하기까지 했다.

"그러게. 어지간해서는 빵점 나오기 힘든데, 엄마는 태어나서 저렇게 빵점 나온 거 처음 봐."

옆에서 내가 더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야, 저게 이상한 거야. 고장 났나 봐."

빵점을 받은 우리 집 멤버가 쉽사리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근데 엄마 생각보다 노래 잘한다."

딸이 빵점 맞은 어느 멤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노래 실력에 대해 한 마디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를 어떻게 생각했길래 그래?"

좀처럼 받기 힘든 그 백 점짜리 점수를 놓고 나는 정색을 했다.

솔직히,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점수는 내 인생에 거의 없었다.

노래방 출입을 시작한 30년 전부터 이례적인 일이다.


"오늘은 노래방에 갈까?"

남편이 긴급 제안을 했다.

"그래, 아빠. 우리 당장 가자."

기원전 2,000년 경에 처음 제 아빠와 노래방 체험활동을 한 딸이 격하게 반겼다.

"그럼, 오늘은 엄마도 같이 가 볼까? 우리 다 같이 가보자."

나도 은근슬쩍 끼기로 했다.

그동안 남편이 너무 바빠서 넷이서 주말에 나들이를 간 지가 까마득해서 억지로라도 나가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노래방 정도라면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직은 초등학생들이었으므로.


"우리 아들도 한 곡 해야지. 뭐 할래?"

누나는 첫 타자로 신나게 노래 부르는데 아들은 표정이 시무룩했다.

"난 별로 안 하고 싶은데."

분명히 저도 좋다고 따라와 놓고는 얌전한 새색시처럼 내 옆에 조신하게 앉아 있기만 하던 아들이 도통 의욕을 안보였다.

"그럼 난 '곰 세 마리'할래."

한창 노래책자를 넘기더니 신중히 한 곡을 골랐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의 봇물은 터졌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예약하고 느닷없이 '아리랑'을 골랐다.

그것도 자그마치 경기 민요로 말이다.

난생처음 방문한 노래방에서 열 살 인생이 부르는 아리랑이라니.

제일 소극적이었던 멤버가 가장 적극적으로 변했다.

누나가 부를 노래를 선곡하고 내게 노래를 추천하고 내가 부를 차례가 됐는데도 자신이 먼저 새치기를 하는 등 자신이 언제 시무룩하게 있었냐는 식이었다.

"좀 아쉽다, 좀 더 부르자 엄마."

넷이서 15곡을 실컷 불렀는데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아들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래. 이번엔 엄마가 한턱낼게. 엄마 카드로 결제하겠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미적거리는 사이 다른 멤버가 잽싸게 결제를 마쳤다.

"어째 엄마가 제일 신난 것 같다?"

두 번씩이나 빵점도 맞고 결제도 마친 멤버가 레짐작 했다.

"엄마가 돈 내려고 했는데 아빠가 내버렸네. 엄마는 다음 기회에 내야겠다."

라며 나는 태연하게 생색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는 두 번 연속 100점이 나왔다.

아들과 딸도 양호한 점수가 나왔는데 어떤 멤버만 연속 빵점이 나왔다.

세 멤버는 그 상황이 우습고 즐거웠지만 그 와중에 그 상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멤버가 있었다.

"이거 기계가 왜 이래? 어떻게 빵점이 나올 수 있어?"

라고 자꾸 기계 탓을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모르겠지만 연속 두 번 빵점이라는 건 기계 이상은 아닌 것 같은데?"

연속 두 번 백점씩이나 받은 나는 속으로는 정말 기계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미심쩍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눈 질끈 감고 약을 올렸다.

"근데 오늘따라 당신 얼굴이 새까맣다."

이 양반아, 새까만 건 내 얼굴이 아니라 당신 속이겠지. 계속 빵점만 나오니까 속이 새까맣게 탔겠지. 괜히 남의 피부색  가지고 타박이셔.아무리 나보고 얼굴이 탔네 어쩌네 해도 댁 얼굴보다 백배는 더 하얘.(라고 나는 늘 주장한다.)


"엄마, 조금만 더 하면 안 돼?"

딸은 좀처럼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했다.

밤이 새도록 노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만간 노래방이라도 차려줘야 할 분위기다.

"아니야, 한 시간도 넘었어. 노래 부르는 것도 은근히 피곤해.(= 엄마가 정말 피곤해서 그래.) 이제 집에 가서 쉬고 다음에 또 오자.(=조금 더 하다가 엄마가 빵점 나오는 참변만은 막고 싶구나.=엄마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


두 번 연속 빵점의 악몽에 시달린 한 멤버와 참으로 열 살 어린이다운 건전한 노래로 인생 첫 노래방 경험을 한 멤버와 가장 많은 노래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더 부르고 싶어 안 날 난 멤버와, 기계 이상일지라도 어쨌든 백 점을 두 번이나 받은 멤버, 4인 가족의 기쁘고도 슬픈 일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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