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어머님께 수화기를 건네주셨다기보다, 어머님께 전화를 바꿔주셨다기보다, 어머님이 아버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그것을 앗아갔다고 여겨지는 성질의 것이었다.
역시 아침 일찍 수선 피운 보람이 있군.
두 분 모두 한꺼번에 통화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춥네요. 감기는 안 걸리셨어요?"
시부모님보다 30년은 더 젊은(젊지만 과연 젊은 것인지 가끔 헷갈린다) 나이인 나도 요즘 날씨에는 자칫 방심했다가는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어른들은 더 취약할 것이다.
"괜찮다. 내가 일 좀 하느라고 밖에 있다가 왔다."
"날도 추운데 또 무슨 일을 하셨어요? 날 따뜻할 때 하시지."
"그래, 알았다."
"곧 수술하셔야 하니까 조심하세요. 감기 안 걸리게요."
"안 그래도 마스크 잘 쓰고 다닌다. 나도 조심하고 있어. 저번에 검사한다고 다리를 좀 썼더니 아프다."
"그러셨죠? 검사하면 좀 힘들죠. 물리치료라도 받으러 가시지 그러셨어요."
"응, 그럴란다."
"저번에 병어도 많이 보내셨던데, 어머님 두고 두시지 뭘 그렇게 많이 보내셨어요?"
"응, 우리는 작은 거 놔두고 너희한테 크고 좋은 거 다 보냈다. 너희 아버님이 많이 사 오셔서 좀 보냈다."
"아휴, 저희는 여기서 조금씩 사 먹으면 되는데. 기름도 두 병이나 보내셨던데요."
"그거 들기름이다. 너희 들기름 먹냐?"
"다들 잘 먹죠. 들기름이 좋다잖아요."
"그래, 전화해 줘서 고맙다, 며늘아."
"아무튼 날씨도 춥고 그러니까 감기 조심하세요. 다음에 또 전화드릴게요."
"그래. 우리 애기들이랑 잘 있어라. 어쩌겠냐, 참고 살면 좋은 날 올 거다. 우리 며느리 고생하는 거 다 안다. 고맙다."
생각해 보면 어머님은 시가에 방문했을 때나 전화를 드릴 때나 마무리는 거의 항상 저 말씀이다.
"네가 참아라. 어쩌겠냐. 참으면 좋은 날 올 거다. 알았지?"
"아니, 어머님! 어머님이 같이 안 사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기예요?! 참으라고요? 대체 언제까지요?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할 때까지요? 좋은 날이 온다는 보장이 있기나 한가요? 넌덜머리가 나 죽을 지경인데 어쩜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을 다 하세요? 무조건 참는다고 능사는 아니잖아요! 도대체 제가 왜 참아야 하죠? 누구를 위해서요? 결국은 어머님 아들을 위해서요?! 어머님이 낳으셨으니 어머님도 다소 책임을 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제 어차피 집 떠났다 이거죠? 제가 엔~간하면(이 대목에서는 반드시 '엔~간하면'이라는 표현을 빌려 써야 옳다, '어지간하다'는 그 표준어로는 이 답답하고 억울하기까지 한 내 마음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므로)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제가 일일이 다 말씀을 안 드려서 그렇지 정말 @$%^&* 이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요!!!"
라고,
버르장머리 없는 며느리 코스프레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물론.
불똥을 엉뚱한 곳에 튀겨서는 아니 될 일이다.
시어머니의 아들은 미워하되, 시어머니는 미워하지 말라.
어느새 내 신조가 되어 버린 그 말을 다시 상기하며 다만 '감마리놀렌산'이 풍부한 들기름 한 숟갈을 먹고, 노화도 예방하고 혈압, 혈당치,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 조절에 뛰어나다는 그 한 숟갈을 또 먹고, 다 뱉어내고 싶은 말이 있어도 꿀꺽 삼키면 그만이다.
때론 침묵이 더 유익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뇌물(?)을 받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고, 일단 받았으니, 게다가 그 뚜껑을 열어 버렸으니,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들기름은 참기름보다 더 산패가 빨리 이뤄진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은 것도 있고 하니, 그것을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하며 그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해야만 하는 의무가 내게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쭉 가는 거다, 일단은...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들과 어머니는 별개다.
또,
그리고,
들기름은 더더욱 죄가 없다.
남편은 미워하되 들기름은 미워하지 말자.
그냥 먹자.
들기름은 먹는 것이지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두 병의 들기름을 다 소비할 때까지는 그래도, 약발이 있을 것이다.(라고 믿고 살아야만 한다.)
비단, 병어와 들기름을 받아서가 아니다, 절대!(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치지만 제 발이 저린 것도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라니!)
하고 싶은 오만가지 말들을 다 쏟아내면 되려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함, 잡히지도 않는 그 불안함, 불안하지만 확신하게 되는 슬픈 예감이 말을 삼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