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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0. 2023

시어머니가 참으라고 하셨다, 또

조용히 받아들인다

2023. 12. 20.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버님, 날씨가 많이 춥죠?"

또 아버님이 받으셨다.

"응."

낮이나 저녁에도 어머님과 통화하기 힘들어 그날은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은 또 어디 가셨어요?"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다."

그것은,

마치,

아버님이 어머님께 수화기를 건네주셨다기보다, 어머님께 전화를 바꿔주셨다기보다, 어머님이 아버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그것을 앗아갔다고 여겨지는 성질의 것이었다.

역시 아침 일찍 수선 피운 보람이 있군.

두 분 모두 한꺼번에 통화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춥네요. 감기는 안 걸리셨어요?"

시부모님보다 30년은 더 젊은(젊지만 과연 젊은 것인지 가끔 헷갈린다) 나이인 나도 요즘 날씨에는 자칫 방심했다가는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어른들은 더 취약할 것이다.

"괜찮다. 내가 일 좀 하느라고 밖에 있다가 왔다."

"날도 추운데 또 무슨 일을 하셨어요? 날 따뜻할 때 하시지."

"그래, 알았다."

"곧 수술하셔야 하니까 조심하세요. 감기 안 걸리게요."

"안 그래도 마스크 잘 쓰고 다닌다. 나도 조심하고 있어. 저번에 검사한다고 다리를 좀 썼더니 아프다."

"그러셨죠? 검사하면 좀 힘들죠. 물리치료라도 받으러 가시지 그러셨어요."

"응, 그럴란다."

"저번에 병어도 많이 보내셨던데, 어머님 두고 두시지 뭘 그렇게 많이 보내셨어요?"

"응, 우리는 작은 거 놔두고 너희한테 크고 좋은 거 다 보냈다. 너희 아버님이 많이 사 오셔서 좀 보냈다."

"아휴, 저희는 여기서 조금씩 사 먹으면 되는데. 기름도 두 병이나 보내셨던데요."

"그거 들기름이다. 너희 들기름 먹냐?"

"다들 잘 먹죠. 들기름이 좋다잖아요."

"그래, 전화해 줘서 고맙다, 며늘아."

"아무튼 날씨도 춥고 그러니까 감기 조심하세요. 다음에 또 전화드릴게요."

"그래.  우리 애기들이랑 잘 있어라. 어쩌겠냐, 참고 살면 좋은 날 올 거다. 우리 며느리 고생하는 거 다 안다. 고맙다."


생각해 보면 어머님은 시가에 방문했을 때나 전화를 드릴 때나 마무리는 거의 항상 저 말씀이다.

"네가 참아라. 어쩌겠냐. 참으면 좋은 날 올 거다. 알았지?"

"아니, 어머님! 어머님이 같이 안 사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기예요?! 참으라고요? 대체 언제까지요?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할 때까지요? 좋은 날이 온다는 보장이 있기나 한가요? 넌덜머리가 나 죽을 지경인데 어쩜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을 다 하세요? 무조건 참는다고 능사는 아니잖아요! 도대체 제가 왜 참아야 하죠? 누구를 위해서요? 결국은 어머님 아들을 위해서요?! 어머님이 낳으셨으니 어머님도 다소 책임을 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제 어차피 집 떠났다 이거죠? 제가 엔~간하면(이 대목에서는 반드시 '엔~간하면'이라는 표현을 빌려 써야 옳다, '어지간하다'는 그 표준어로는 이 답답하고 억울하기까지 한 내 마음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므로)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제가 일일이 다 말씀을 안 드려서 그렇지 정말 @$%^&* 이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요!!!"

라고,

버르장머리 없는 며느리 코스프레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물론.

불똥을 엉뚱한 곳에 튀겨서는 아니 될 일이다.


시어머니의 아들은 미워하되, 시어머니는 미워하지 말라.

어느새 내 신조가 되어 버린 그 말을 다시 상기하며 다만 '감마리놀렌산'이 풍부한 들기름 한 숟갈을 먹고, 노화도 예방하고 혈압, 혈당치,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 조절에 뛰어나다는 그 한 숟갈을 또 먹고, 다 뱉어내고 싶은 말이 있어도 꿀꺽 삼키면 그만이다.

때론 침묵이 더 유익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뇌물(?)을 받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고, 일단 받았으니, 게다가 그 뚜껑을 열어 버렸으니,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들기름은 참기름보다 더 산패가 빨리 이뤄진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은 것도 있고 하니, 그것을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하며 그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해야만 하는 의무가 내게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쭉 가는 거다, 일단은...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들과 어머니는 별개다.

또,

그리고,

들기름은 더더욱 죄가 없다.

남편은 미워하되 들기름은 미워하지 말자.

그냥 먹자.

들기름은 먹는 것이지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두 병의 들기름을 다 소비할 때까지는 그래도, 약발이 있을 것이다.(라고 믿고 살아야만 한다.)

비단, 병어와 들기름을 받아서가 아니다, 절대!(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치지만 제 발이 저린 것도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라니!)

하고 싶은 오만가지 말들을 다 쏟아내면 되려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함, 잡히지도 않는 그 불안함, 불안하지만 확신하게 되는 슬픈 예감이 말을 삼키게 한다.

자고로 본전도 못 찾을 소리는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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