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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19. 2023

미시들 사이에서 난리가 나든가 말든가

나랑 상관없잖니

2023. 12. 17.

< 사진 임자 = 글임자 >


그러니까,

그것은,

뭐랄까,

본능이다.


노트북을 켰다.

분명히 목적은 'Easy Writing'을 복습하기 위해서였다.

오전에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내용을 마저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밤 10시면 빠뜨린 표현을 겨 기록하기에 딱 좋은, 황금 시간대였으므로.

그러나 나는 이내 깨달았다.

야심한 그 시각에 야식은 안먹을지언정 '못사는 의류 구경이나 한번 해 보기'에도 황금 시간대라는 것도.

신천지가 나타났다.

나는 분명히 로그인을 하려고 오른쪽 중간 빈자리에 커서를 대려고 했다.

그러나 마우스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이 또한 본능이었다.(라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친다.)

'미시들 사이에 난리난 기모 바지'라는 문구가 나를 붙들었다.

물론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다른 미시들에게 어떤 난리가 났는지 어쨌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당장 내게 난리난 일이, 난리 날 일이 더 급하다.

아니, 설사 난리가 났다 하더라도 그건 먼 나라 남의 나라 일일 뿐이다.

그러나 같은 '미시'로서 다른 미시들에게 어떤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 정도는 가질 수 있는 일 아닌가.

세상은 혼자만 사는 곳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동시대를 사는 내 나이 또래의 미시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애정이랄까?

게다가 화면에 비친 아이보리색 기모 바지의 뒷모습이 제법 그럴듯했다.

뒷모습이 저 정도인데 앞모습은 더 대단하겠지?

과연 정말 그러한지,

난리가 날 정도의 바지인지,

이쯤 되면 확인을 해 볼 필요도 있었다.

난리 안나기만 해 봐라.

꼭 사려고 마음을 먹어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럴 리도 있겠지만,

'딱 내 취향'이라면 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래야 경제가 돌아가니까.

잠재적 소비자로서 소위 트렌드라는 것을 약간은 꿰찰 필요도 있었고(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긴 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요새 어떻게 입고 다니나 사대의 흐름에 어느 정도 발맞출 의향도 있었고(굳이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난리 났다'는 그 표현이 과연 적절히 맞아떨어지는지 매의 눈으로 확인할 필요성마저 느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실구매자가 적나라하게 후기를 남기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을 직시하자면 결국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게.


"이제 출근도 안 하는 사람이 옷이 왜 필요해?"

라고 찬물 끼얹는,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 집 멤버의 단골 노동요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출근 안 하면 옷도 안 입고 살아? 누가 산다고 했어? 보는 것도 못해? 산다는 게 아니잖아! 그냥 보기만 하는 거라고. 구경 말이야,구경! 구경이 뭔지 몰라? Just browsing! window shopping!! 쉽게 말해 '아이 쇼핑'  말이야!!!"

라고 되받아 치던 내 지난날도 불현듯 떠올랐다.


과속 위반 과태료 고지서 사건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 집 직장인은 내가 하는 오만가지 말들은 다 흘려듣고 건성으로 들으면서, 저런 일에는 꽤나 집요한 면이 있다.

적어도 나는 자숙 기간이란 걸 가져야 하리.

자숙 기간 최소 소요 일수라는 게 있다, 내 나름대로는.

씁쓸하게 쇼핑 몰 창을 닫으며 혼자만 가만히 생각했다.

솔직히 난리 날 정도는 아니다,라고.

포도는 먹을 수라도 있지, 옷 저거는 먹지도 못하는데, 아무리 배가 고프고 기아에 허덕인다 한들 기모바지를 먹어 치우는 '미시'가 있다는 소문은 여태 들어보지도 못했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로.

또, 곧 여름인데, 한 여름이 코앞인데...

그러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중생이 한 명 있을 뿐이다.

그 과태료 사건만 없었더라도 내가 그 기모 바지를 하나 장만해서 진짜 난리 칠 수도 있었는데.

아니지, 나의 쇼핑 행태가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그 존재가 더 난리를 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쩜,

딱 그 과태료 자진 납부금과 비슷한 금액이네.

그러면서도,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 바지 한 벌을 구입하지 않음으로써 환경 보호에 이바지한 거야.

지구가 아프잖아,

잘 빠져나왔어.


처음부터 너란 존재는 내게 없었어.

나랑은 인연이 아닌 걸로.

세상 모든 미시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하더라도,

그 난리 속에 나는 빠지는 걸로,

과감히 불참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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