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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1. 2023

0.1초만 본다면

만든 외손주들

2023. 2.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


"곧 할머니 생신인데 이번에는 너희가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보는 게 어때?"

"뭘로?"

"집에 있는 것들로 하면 되지."

"그럴까? 재미있겠다, 엄마."


아무렴,

재미있고 말고.

재미있겠지,

재미있을 예정이고 말고!


마침 과일 케이크를 만들기 딱 좋은 재료들이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친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오랜 기간 키워 주셔서 부모님은 친손주들보다 외손주들을 더 애틋해하시는 것 같다.(고 착각하며 나는 살고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더 세게 깨물면 더 아플 것이고, 살살 깨물면 덜 아프겠지?

어느 정도의 세기로 깨무느냐가 관건이다.

"엄마 일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신 너희 키워주셨잖아. 아기 때 이유식도 할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주시고 말이야. "

"언제?"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느닷없이 한 오백 년 전 이야기가 다 웬 말이냐는 얼굴로 딸이 되물었다.

"언제긴 언제야, 너희 어렸을 때지! 특히 합격이 너는 엄마가 출산휴가 끝나고 육아휴직을 6개월 밖에 안 해서 너 낳고 9개월 만에 다시 출근했는데 그때부터 너 길러 주셨지."

"그랬나?"

"그랬나가 아니라, 그랬어."

"난 기억도 안 나는데."

럴수, 럴수, 이럴 수가!!!

"기억이 안 난다고? 5년씩이나 키워 주셨는데?"

보살핌을 받은 당사자는 전혀 기억이 없고, 보살핀 사람들만 기억이 남아있는 이런 아이러니라니!

"사진을 봐야 알겠네. 아무튼 할머니 생각하면서 케이크 만들어 보자."

여행을 갈 때도, 특히 손주들을 키울 때도 남는 건 사진뿐이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의 보호자들이여, 무조건 찍어서 증거자료를 남길지어다!

정말 우리 부모님은 내가 복직한 이후로 내 두 아이를 애지중지하며 열과 성을 다해 돌봐 주셨다.

친정 엄마 생신을 맞아 다른 건 몰라도 케이크는 아이들과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다.

평소에도 뭐든 직접 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잘만 하면 넘어오겠다 싶은 확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근데 엄마, 빵이 있어야 하지 않아?"

"그럴 줄 알고 엄마가 케이크 시트를 주문해 놨지. 그것도 두 개나. 외삼촌 외숙모들 다 오시고 애들까지 다 오면 거의 스무 명이니까 두 개는 있어야겠지?"

"그런데 어떻게 만들지?"

"먼저 생각을 해 봐. 무조건 아무 거나 막 올리는 것보다는 미리 그림을 그려 보고 그거 보면서 하는 게 어때?"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그럼 내가 원하는 케이크를 그려 볼게. 난 과자 케이크를 만들래!"

여태 잠자코 있던 아드님께서 그 순간, 가장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나, 평소 과자라곤 집에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 집이라 콩알만 한 카카오를 급히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예로부터 카카오 한쪽도 케이크 위에 올리라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진지하고도 열심히 케이크 만들기에 돌입했다.

빵 시트 사이에 크림이 살짝 발라져 있어서 크림은 따로 두 개만 더 사고, 있는 과일을 최대한 활용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저것이다.

케이크 판이 없어서 사각 접시에 바로 올려 우리 세 멤버는 최대한 재주를 부렸다.

왼쪽은 아이들이 밑그림까지 그려가며 주가 되어 만든 것이고, 오른쪽은 내 마음대로 만든 것이다.

전에도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결과물이 제법 그럴듯하게 나왔다. 0.1초만 흘낏 보면 사 왔다고 세 멤버가 단합해 거짓말해도 넘어가겠다(그 대상은 반드시 우리 집 멤버 중 직장생활을 하는 무딘 성격의 소유자여야만 할 것이다.)고도 생각했다.

"우와, 엄마 우리 진짜 잘 만들었다, 그치!"

아이들은 스스로 기쁨에 겨웠고, 알록달록한 두 개의 케이크 앞에서 나는 감개무량해지고 말았다.

걷지도 못하던 아기들이, 똥오줌도 못 가리던 아기들이 벌써 할머니 생신 케이크를 다 만드는 날이 오다니!

"얘들아, 할머니한테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때? 너희 키워 주셨는데 고맙잖아."

나는 최대한 강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은근슬쩍, 그러나 누가 듣기에도 반강제로 떠보았다.

"에이, 케이크 만들었으면 됐지, 무슨 편지까지 써? 안 써도 돼."

"그래. 너희가 안 하고 싶으면 그만이지 뭐."

싫은 건 싫다고 확실히 의사표현을 하는 두 멤버는 단칼에 거절했다.

어라?

안 넘어오네?


"할머니, 우리가 직접 케이크 만들어 왔어요. 생신 축하해요!"

호들갑을 떨며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려다가 하마터면 그것이 찌그러질 뻔한 위기를 몇 차례 모면하고 그 정체를 드러냈을 때 가족들은 환호했다.

"우리 손지(손주)들이 케이크도 다 만들어 주고. 고마워."

까맣게 그은 엄마 얼굴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남매의 케이크는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만들어 놓고 보니 서로 비슷한 듯 다른 듯, 남매와 나는 서로 베낀 게 아니냐며 표절 시비가 일긴 했지만, 누가 누구를 벤치마킹 했는지는 확실히 할 수 없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우니까 더 이상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사 먹는 케이크도 다 모습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라고 나만 혼자 단정 지었다.)

생크림보다 더 달콤한 마음이 사이사이 발라지고 고마운 마음이 아낌없이 장식된 그 리미티드 에디션, 돈 주고도 못 사는 가장 값진 케이크, 그 모습도 예쁘지만 기꺼이 할머니를 위해 품을 들인 그 마음이 훨씬 더 예쁘기만 했다.

시작은 의뢰(?)였지만 그 끝은 화기애애, 엄마의 생신날의 전부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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