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사이가 아니니까 꽃 대신 삼계탕
그의 고시원알이 가던 날, 내 생애 두 손 가장 무거웠던 날
by
글임자
Oct 15. 2022
22. 10. 14.
< 사진 임자 = 글임자 >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무슨 짐이 이렇게나 많아요?"
그는 나의 짐을 정말 짐스러워했다.
찰나였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스러워하던 표정도 잊히지 않는다.
도회지에서 자취하는 아들을 위해 촌에서 밑반찬 만들어 보따리에 바리바리
싸서 상경하면
"창피하게 이 보따리는 다 뭐야? 이런 걸 뭐 하러 가지고 와?!"
이러면서 세상 궁상맞은 옷차림으로 엄마 마중 나온 철없는 아들처럼 말이다.
내가 또 저런 소리나 듣자고 버스를 세 대나 갈아타 가면서 가정방문을 했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주책맞게 나섰던고?
'정신 차려, 저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야!'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오지랖 음식을 들고 간 것은 순전히 그날의 무더위 때문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온 '때문에 씨'의 '반응 때문에' 이고 지고 싸들고 온 보람도 없이 맥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짐이 많으면 차라리 택시를 타고 오지 그랬어요? 이 많은 걸 들고 어떻게 버스를 탔어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지만 그 엉뚱한 소리를 하는 그 사람이 정작 미운 것이다.
죄는 죄가 없다, 사람에게 죄가 있는 거지.
시큰둥하다 못해
못마땅해하던 태도가 바뀐 것은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였다.
이 시대 최고의 변절주의자라 불려야 마땅하리.
경망스러운지고.
이래저래 내 스타일은 아니로세.
"이렇게까지 임자 씨가 나를 생각해 주는 줄은 몰랐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고마워요."
잠깐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내가 "때문에 씨'를 '이렇게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지금은 아무 말 대잔치 시간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단번에 알아본 점, 그 탁월함만큼은 높이 사겠습니다.
내가 지방직 일행에 최종 합격하고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던 중에
그도 국가직 공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자로 붙어서 그 후로도 몇 번 쪽지가 오갔고 둘의 전화번호는 요단강을 기어코 건너가고 말았으며, 자연스레 문자가 오가고 한 번은 산에서 만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의 김밥을 내 몫까지 부록으로 흡입하고 헤어지기 전에 나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첫 만남에 서로가 극도의 '외모지상주의자'라는 점만 확인하고 그대로 끝날 줄로만 알았다.
사회 적응 갱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두 공시생의 급작스러운 만남으로 시작한 몹쓸 인연은 '때문에 씨'의 국가직 최종 합격자 발표와 더불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얼굴을 한 번 본 이후 그는 종종 내게 전화씩이나 걸어오는 대범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국가직 합격을 확인한 뒤부터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는 자기 사는 쪽으로 바람이나 쐬러 오라고 나를 부추겼다.
가정방문을 오라는 게로군.
세상에 가장 서러운 사람이 독거 젊은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한 번 더 얼굴 본다고 해서 세계 평화가 깨어지거나 국가 간 질서가 어지럽혀진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세상 가장 조신한 태도로 그리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가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은 절대 아니야,
단지 1인 가구 독거인 실태 조사를 하는 것뿐이야.
그날의 가정방문은 훗날 주민등록 사실 조사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어쩐지, 처음 만난 날부터 '다음에 또 보고 싶다'라고 간절한 눈빛을 보이더라니.
공부만 하느라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사람 볼 줄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있었나 봐.
기특한 젊은이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사람 잘 볼 줄 아는 젊은이는 흔치 않을 텐데 말이다.
공무원 시험에 '사람 보는 능력' 과목이 있었더라면 필시 전국 수석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나를 증거자료로 제출하겠다면 기꺼이 협조할 의향이 있었다.
처음엔 그가 내 쪽으로 왔으니, 두 번째는 내가 그쪽으로 공평하게 한 명씩 오갔다.
김밥 도시락이 빚은 참사를 애도하는 기간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나를 자신의 고시원으로 초대했다.
아니 불러들였다.
그것도 아니지.
유인했다, 고 훗날 나는 강력히 주장했다.
뒤늦게 항의했다.
광역시에 거주해 본 역사가 없는 순진한 군민을 은근슬쩍 자신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사람, 그는 틀림없는 '유인원'이었다. 외간 남자를 거절도 못하고 한 번의 군내버스와, 한 번의 시외버스와 한 번의 시내버스를 타고 유인당한 나도 부인할 수 없는 유인원이었다.
나는 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삼계탕이다.
삼복 중 어느 언저리였을 것이다.
김밥 사건 이후로 그는 걸핏하면 기아에 허덕이는 독거인임을 강조했다.
"나는
고시원에서
밥도 잘 못 먹고살아요, 살아요, 살아요~"
메아리 되어 내게 울렸다.
헛것이 들린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한여름 땡볕에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삼계탕을 만들어 압력솥 째 보자기에(주의할 점은 반드시 보자기에 꽁꽁 싸매야 한다는 점이다.) 싸서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고시원에 들이닥치다니,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필시 더위를 왕창 먹은 게 틀림없다.
보통의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무더위에 삼계탕을 만드는 대신 식당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에게 천국의 문들 두드릴 기회를 한 번쯤은 주었어야 했다.
죽어서는 못 가는 천국, 살아서라도 보내줬어야 했다.
연이은 그의 '연민에의 호소'에 다시 한번 '측은지심'이 마구 싹텄다.
처음에 싹이 삐죽 보였을 때 그때 아예 싹 잘라버렸어야 하는 건데...
될 성 부르지도 않은 나무는 떡잎부터 제거해야 하는 법이니까.
지금은 분명히 알겠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첫 만남에서나 두 번째 만남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는 것을.
내가 준비해 간 삼계탕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가 내어준 마른(게다가 맛도 없는) 석고가 된 식빵에 빨간 케첩을 뿌릴 때까지만 해도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했다.
어쨌거나 그날, 나의 삼계탕 요리와 '혼자만의 배부른 착각'으로 그는 무척이나 포만감을 느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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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ch Book
연하남 공시생 연상녀 장수생
08
다만, 그의 만담에서 저를 구하소서.
09
그날, 김밥을 함부로 싸는 게 아니었다.
10
외모지상주의자들의 잘못된 만남
11
아무 사이가 아니니까 꽃 대신 삼계탕
12
서로 이상형은 아니지만 '오늘부터 1일'
연하남 공시생 연상녀 장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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