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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5. 2023

본전도 못찾을 거 알면서 그래

생일에도 아무말 대잔치를

2022. 12. 20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젠 출근도 안하는데 이 정도는 집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다른 집 여자들도 남편 생일에 다 해줘. 직장 생활하면서 애들도 잘 키우고 남편 생일상도 당연히 집에서 다 장만해서 차려주고 그래. 당신만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남들도 기본으로 이 정도는 한다고! 케이크도 직접 만드는 거 우리 애들만 하는 거 아니야, 다른 집 애들도 다 하는 거야. 어차피 집에서 매일 먹는 반찬에 잡채하고 전 서 너 가지 한 거 밖에 더 있어? 생선도 평소 먹던 거고 통닭도 심심하면 집에서 구워 먹는 거잖아. 맨날 먹던 들깨 미역국에 심심하면 레몬청이랑 자몽청 만들어 놨던 거 그냥 물에 타서 내 놓은 것 뿐이잖아? 끼니마다 새 밥해서 먹는 건 평소랑 똑같은데 이건 뭐 평소랑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그래도 남편 생일인데 너무 약소한 거 아니야?! 애걔걔, 설마 겨우 이게 다야?"

라고 할 줄 알았다, 나는 그 양반이.

이런 게 학습된 무기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젠 일도 안하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런 건 당연히 집에서 다 해야지. 남들도 이 정도는 다 해"

라고 늘 말해왔던 직장인이었으므로 시큰둥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거 다 당신이 한 거야?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진짜 맛있겠다. 우리 엄마도 내 생일날 이렇게 안차려줬었는데."

이렇게 호들갑을 다 떨었다.

어마? 이 양반이 웬일이람?

"누구 말마따나 이젠 출근도 안하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안그래? 다른 집 여자들은 더 많이 하겠지, 직장까지 다니면서도?"

"그냥 간단히 하면 되지."

"간단히 몇 시간 밖에 안했어. 많이 잡솨."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집에서 이것저것 해 먹는 편이었는데 이젠 그 일도 많이 시들해져서 최대한 간단한 음식만 만들어 먹고 있다.

어서 빨리 꿈의 알약이 나와서 밥도 안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성장기에 있는 어린 것들이 둘이나 있으니 뭘 하긴 해야만 한다.


"얘들아, 너희 엄마가 이렇게 아빠 생일상 차려준 적은 결혼하고 처음인 것 같다."

이 양반이 또 엉뚱한 소리 하시네?

"처음은 뭐가 처음이야. 비슷하게는 몇 번 했지."

이래서 생일상 차려준 공은 없다니까.

"아니야.  옛날에 일  할 때는 진짜 안해줬어."

"안해주긴 뭘 안해줘? 안해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댁이지.옛날에 다른 여자 친구가 안해줬겠지. 난 안해줬어도 해줬으니까 가만히 있기나 해."

"옛날엔 그냥 간단히 해줬잖아."

"그건 뭐 해준 것도 아니야? 그러는 본인은 내 생일에 밥이라도 한 번 해줘봤어? 내 생일 안지도 얼마 안됐으면서. 그리고 전엔 나도 같이 일했는데 내가 일하면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디서 생일상 타령이야?!"

"그래, 그러긴 했지. 알았어."

"또 본전도 못찾을 계속 소리 할래? 한번 해 볼까? 아침에 출근할 때 한번이라도 밥 해서 차려본 적 있어? 아무 것도 안했으면서 지금 뭐하자는 거야?양심이 있으면 제발 그냥 가만히 있기나 하라고!!! 상 다 치워버리기 전에!"


그 양반은 왜 그렇게 본전도 못찾을 소리를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맞벌이를 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뭐든지 다 해주기만 바랐을까?

"어? 내 밥은 안차렸네?"

최소한 본인 밥은 본인이 차려 먹는 하찮은 일 같은 것도  한 적도 없으면서, 출근 준비에 미친듯이 바쁠 때 아이들 밥까지 먹이고 등원 준비하고 각각 다른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느라 정신없을 때도 내게 렇게 말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나머지를 다 하고 있는데 본인 밥 정도는 차려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 뭐 시간이 남아 돌아서 새벽부터 일어나 아이들 뒷바라지에 살림에 출근까지 한 줄 아시나?


밥을 해서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반찬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내 밥을 차리라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 밥을 차려 내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아이들 입히고 씻기고 먹여서 어린이집 데려다 주라는 것도 아니잖은가?

저 모든것들은 내가 다 했으니 본인 밥 한그릇만 먹고 싶으면 있는 밥 덜어 먹으라는 건데,

본인은 항상 아침마다 실컷 잠도 다 자고 일어나서 밥 안차려놨다고 저 따위 소리를 하던 때가 떠올라 기가 막혔다, 또.

저런 걸 소위 고급 전문 용어로 '매를 번다' 내지는 '본전도 못찾을 소리 한다', '호강에 겨웠다'라고 한다지 아마?

하지만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생일날만큼은 겉으로라도 화목한 가정 코스프레가 필요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면서.

이 양반아,

잠자코 있기나 하셔라.


사진 정리를 하려고 뒤적이다가 문제의 그 사진을 발견했다.

나중에라도 혹시, 만에 하나, 설마 그럴 리도 있겠지만, 내가 가족들의 생일상을 못차려 주게 될 사태에 대비해서 간직해 온 것이다. 차린 게 없을 때 그 사진이라도 밥상에 올려 놓고 밥을 먹을 요량으로 말이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전래동화속 조기를 매달아놓고 한 번씩 쳐다보며 밥 먹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증거자료로서의 역할도 한 몫 톡톡히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기도 하다.

"우와, 내 생일이라고 이렇게 차린 거야? 우리 엄마도 이런 상은 차려줬어. 고마워. 역시 엄마가 최고네. 그치, 얘들아?"

라고 있는 호들갑 없는 호들갑을 생일상을 저당잡혀 다 떨었던 양반이 우리 집에 계셨다.

"그래, 아빠는 최저고. 그치, 얘들아? 케이크는 애들이 만든 거야."

그 와중에 나는 수제 케이크를 만든 이들이 우리집의 자랑스러운 두 어린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넘어갔다.


어쩐지

초반에 화기애애하다 했어.

이 양반아, 새겨 듣기 바란다!

생일날 '옛날  맞벌이 시절' 타령은 금지야,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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