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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6. 2023

너희가 작정을 했구나

2023. 12. 25.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내일 늦잠 좀 자고 싶으니까 깨우지 마. 알았지?"

그래봤자 분명히 새벽 6시도 안 되어 깰 게 분명했지만 일단은 선포했다.

"안돼, 엄마, 내일은 좀 일찍 일어나야 해."

어차피 학교도 안 가는 크리스마스인데 아들이 펄쩍 뛰었다.

비록 학교는 안 가지만 최소한 아침 8시에는 일어나야 한다고 말이다.

평소 같으면

"그래, 엄마. 푹 자요. 안 깨울게. 걱정하지 마요."

라고 대답할 아들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엄마의 기상 시간까지 정해주는 거람?

음,

뭔가 있어.

암, 있고말고.

그런데 뭐가 있는 거지?

설마 또 저번처럼 제 누나랑 같이 아침 밥상을 차려놓으려고 그러시나?

못 이기는 척하고 일찍 일어나도 8시가 되기 전까지는 거실로 나가지 말아야 하는 건가?


"엄마가 요즘 피곤해서 그러는데(그 양반이 목요일부터 출근을 하지 않아서 계속 집에만 있으니까 내가 많이 피곤했다, 진심으로. 자그마치 5일 동안이나 말이다.) 좀 늦게까지 자면 안 돼? 어차피 아빠도 출근 안 하고 너희도 학교 안 가잖아. 일찍 안 일어나도 되잖아. 너희도 실컷 늦잠 자도 되고.(=제발 늦게 늦게 일어나 주라.)"

"안된다니까, 엄마. 늦잠 자면 안 돼.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일어나야 해."

"그렇게 빨리? 아휴, 늦잠 자봤자 또 6시 넘으면 일어나겠지 뭐."

아이들은 학교 안 가는 날은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는 몹쓸 습성(?)이 있어 가끔은 내가 억울하기까지 할 때가 다 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야단이람?

딱히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 나의 불길한 예감대로 새벽에 잠에서 깼다.

아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못 박은 시각이 있었으므로 근질근질해도 거실로 행차해서는 아니 되었다.

신신당부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배가 고팠지만 꾹 참았다.

얼추 아이들이 추는 춤에 장단을 맞춰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엄마에게는.

8시가 되어 모닝스페셜이 시작됐고 여전히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들이 불렀다.

"엄마, 나와봐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거실엔 벌써 그 양반도 나와있었다.

얘들이 웬일로 엄마 아빠를 다 한자리에 모신 거지?

"아빠도 엄마 옆에 서서 뒤 돌아봐요. 눈 감고 있다가 다 됐다고 하면 그때 뒤돌아 봐요."

이 녀석들이 뭔가 있긴 있구나, 정말.

이쯤 되면 궁금증을 넘어 기대되는걸?

"엄마, 기다려. 아직 돌아보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들은 둘이 쑥떡쑥떡 뭐라고 하더니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다 됐어. 돌아봐도 돼."

세상에, 만상에!

딸과 아들은 웬 종이가방을 나와 그 양반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아빠, 그동안 우리를 위해서 선물 사 준거 고마워요!"

그러니까 작년에 어떤 모의 결과가 다 들통이 나서 올해부터는 피차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모든 걸 순순히 받아들였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이실직고하고 자수를 하고 비로소 우린 광명을 찾았다.

"그동안 엄마랑 아빠가 우리 크리스마스마다 선물해 줬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엄마 아빠한테 선물을 준비했지. 이거 사느라 한 달 용돈의 거의 다 썼어."

종류가 꽤 여러 가지였다.

볼펜, 공책, 과자, 스노볼, 풍선껌, 말랑이 등등 철저히 초등생 취향에 맞춘 선물이었다.

"줄 거면 어른들 취향에 맞게 줄 것이지 이건 순전히 자기들 취향에 맞춰서 산 거네."

그 양반이 눈치 없이 또 아무 말 대잔치를 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찬물 더운물 가린다'라고 한다지 아마?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이 양반아!

아이들이 기특하지도 않아?

"주는 대로 받기나 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그러니까 애들이지. 우리 애들 같은 애들도 없어!"

"어쩜, 우리 아들 딸은 이런 선물을 할 생각을 다 했을까. 정말 고마워! 엄마 이 스노볼 정말 갖고 싶었던 건데!!!"

라고 나는 최대한 호들갑을 떨었음은 물론이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줄도 모르는 것들이 잔뜩이잖아? 이거 다 불량 식품들 아니야?!"

라는 말을 꾹 참는 인내심도 다 보일 줄도 알았다.


"이건 스트레스받을 때 주무르면 되고, 이건 엄마 영어 공부할 때 쓰고, 이건 껌이고, 이건 엄마가 좋아하는 매운맛 과자야. 저번에 엄마가 이거 맛있다고 했잖아."

어쩜, 우리 아들은 엄마 말을 허투루 듣는 법이 없다니까.

이런 아들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어쩌나?

가진 자의 오만방자함을 다 떨고,

"엄마랑 같이 먹자. 맛있는 건 같이 나눠 먹어야지."

라면서 과자를 앉은자리에서 몽땅 먹어치워 버렸다.

내 것은 일단 먹고 떨어지면 그 양반에게 기부할 생각이 없느냐고 넌지시 물을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이런 아들 딸 있으면 아무 걱정 없겠다고, 무슨 복으로 저렇게 기특한 자식들을 낳았냐고, 데려가 키우고 싶다고, 저 정도면 업고 다니겠다고,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척척하는 아이들이 있어 좋겠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자주 듣는다.

물론 10,000% 동감한다.

그러나,

그들이 치명적으로, 간과한 우리 집 멤버가 한 명 있다.

신변보호 차원에서 누군지 절대 밝힐 수 없지만...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역시 사람은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인가 보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간헐적) 평화가 찾아온 크리스마스 아침,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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