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요즘 피곤해서 그러는데(그 양반이 목요일부터 출근을 하지 않아서 계속 집에만 있으니까 내가 많이 피곤했다, 진심으로. 자그마치 5일 동안이나 말이다.) 좀 늦게까지 자면 안 돼? 어차피 아빠도 출근 안 하고 너희도 학교 안 가잖아. 일찍 안 일어나도 되잖아. 너희도 실컷 늦잠 자도 되고.(=제발 늦게 늦게 일어나 주라.)"
"안된다니까, 엄마. 늦잠 자면 안 돼.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일어나야 해."
"그렇게 빨리? 아휴, 늦잠 자봤자 또 6시 넘으면 일어나겠지 뭐."
아이들은 학교 안 가는 날은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는 몹쓸 습성(?)이 있어 가끔은 내가 억울하기까지 할 때가 다 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야단이람?
딱히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 나의 불길한 예감대로 새벽에 잠에서 깼다.
아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못 박은 시각이 있었으므로 근질근질해도 거실로 행차해서는 아니 되었다.
신신당부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배가 고팠지만 꾹 참았다.
얼추 아이들이 추는 춤에 장단을맞춰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엄마에게는.
8시가 되어 모닝스페셜이 시작됐고 여전히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들이 불렀다.
"엄마, 나와봐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거실엔 벌써 그 양반도 나와있었다.
얘들이 웬일로 엄마 아빠를 다 한자리에 모신 거지?
"아빠도 엄마 옆에 서서 뒤 돌아봐요. 눈 감고 있다가 다 됐다고 하면 그때 뒤돌아 봐요."
이 녀석들이 뭔가 있긴 있구나, 정말.
이쯤 되면 궁금증을 넘어 기대되는걸?
"엄마, 기다려. 아직 돌아보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들은 둘이 쑥떡쑥떡 뭐라고 하더니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다 됐어. 돌아봐도 돼."
세상에, 만상에!
딸과 아들은 웬 종이가방을 나와 그 양반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아빠, 그동안 우리를 위해서 선물 사 준거 고마워요!"
그러니까 작년에 어떤 모의 결과가 다 들통이 나서 올해부터는 피차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모든 걸 순순히 받아들였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이실직고하고 자수를 하고 비로소 우린 광명을 찾았다.
"그동안 엄마랑 아빠가 우리 크리스마스마다 선물해 줬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엄마 아빠한테 선물을 준비했지. 이거 사느라 한 달 용돈의 거의 다 썼어."
종류가 꽤 여러 가지였다.
볼펜, 공책, 과자, 스노볼, 풍선껌, 말랑이 등등 철저히 초등생 취향에 맞춘 선물이었다.
"줄 거면 어른들 취향에 맞게 줄 것이지 이건 순전히 자기들 취향에 맞춰서 산 거네."
그 양반이 눈치 없이 또 아무 말 대잔치를 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찬물 더운물 가린다'라고 한다지 아마?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이 양반아!
아이들이 기특하지도 않아?
"주는 대로 받기나 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그러니까 애들이지. 우리 애들 같은 애들도 없어!"
"어쩜, 우리 아들 딸은 이런 선물을 할 생각을 다 했을까. 정말 고마워! 엄마 이 스노볼 정말 갖고 싶었던 건데!!!"
라고 나는 최대한 호들갑을 떨었음은 물론이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줄도 모르는 것들이 잔뜩이잖아? 이거 다 불량 식품들 아니야?!"
라는 말을 꾹 참는 인내심도 다 보일 줄도 알았다.
"이건 스트레스받을 때 주무르면 되고, 이건 엄마 영어 공부할 때 쓰고, 이건 껌이고, 이건 엄마가 좋아하는 매운맛 과자야. 저번에 엄마가 이거 맛있다고 했잖아."
어쩜, 우리 아들은 엄마 말을 허투루 듣는 법이 없다니까.
이런 아들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어쩌나?
가진 자의 오만방자함을 다 떨고,
"엄마랑 같이 먹자. 맛있는 건 같이 나눠 먹어야지."
라면서 과자를 앉은자리에서 몽땅 먹어치워 버렸다.
내 것은 일단 먹고 떨어지면 그 양반에게 기부할 생각이 없느냐고 넌지시 물을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이런 아들 딸 있으면 아무 걱정 없겠다고, 무슨 복으로 저렇게 기특한 자식들을 낳았냐고, 데려가 키우고 싶다고, 저 정도면 업고 다니겠다고,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척척하는 아이들이 있어 좋겠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자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