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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29. 2024

우리 사이 700일

가족들과 공부하는 방법

2024. 1. 24.

<사진 임자 = 글임자 >


"합격아, 너는 지금 며칠이나 됐지? 엄만 700일이야."

"축하해, 엄마. 난 엄마보다 한 달 정도 더 됐지. 730일 넘었어.

"그럼 우리 아들은 얼마나 됐지?"

"어쩌면 난 0일 됐을지도 몰라."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게다가 우리는 각자 날짜가 달랐다.

난 벌써 700일이나 됐다.

2년을 채우려면 아직 며칠이 더 필요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이어온 내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물론 딸이 가장 대견했고 말이다. 그 와중에 요즘 몸이 안 좋은 아들이 이틀 빼먹어서 0일이 돼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당장 확인을 해 봤을 때 다행히 '687일'이라는 연속학습 일수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안도했다.


그러니까 우리 집 네 멤버들이 영어 공부를 단체로 시작한 건 2022년 1월이었다.

"우리 가족들이 다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영어 사이트가 있는데 우리 한번 해보는 게 어때? 게임처럼 하면 재미있겠는데?"

남편이 처음 그 일에 착수하려 했을 때 처음에 아이들은 반발했다, 물론.

"아빠, 그런 걸 뭐하러 해. 영어가 제일 싫어."

라고 가장 불만을 표출했던 멤버는 단연 딸이었다.

"그게 뭔데? 게임하는 거야? 나 해 볼래."

이제 막 의무교육 1년 차를 지나온 아들은 잘은 몰라도 '게임처럼'이라는 아빠의 달콤한 말에 눈멀고 귀 멀어 쉽게 포섭당했다.

"그런 게 있어? 우리 넷이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 대화도 하면 진짜 재미있겠는데?"

라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남편의 미끼를 덥석 물었던 멤버는 또 단연 나였다.

영어는, 평소 그냥 내 생활의 일부라 여겨왔던지라 나는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영어 실력이 유창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란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절대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냥 새로운 표현을 배우고 익히는 게 재미있다는 정도일 뿐이다.

이왕이면 배워서 써먹어 보면 좋고, 배워서 내가 가질 것이니까, 마침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치매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뉴스 기사가 종종 나왔으므로 남편의 제안은 내게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EBS영어 방송도 20년 넘게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이 또한 내가 다 듣고 이해해서는 아니란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쇼핑하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으시지만 학습 관련 서핑에도 매우 능한 남편은 언제 그런 것을 알아봤는지(사실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를 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8할 이상이긴 했지만)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영어 사이트를 내게 몇 개 보이며 분석까지 했다.

아이들과 내가 찬찬히 살펴보고 최종적으로 결정한 곳이 바로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는 바로 그 사이트이다.

그곳에서는 승급이 있고, 서로 팔로우도 할 수 있으며(전 세계인이 다 학습하는 사이트라 영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언어가 있다.) 가족끼리 서로 뭔가 주고받고 할 수도 있고, 점점 단계를 높이면서 승부욕을 부추기기도 했으며 매번 순위를 매겨서 은근히 학습욕구도 부추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딸 성격에 결국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못마땅해하던 딸이 1위를 한 번 하고 나자 하루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곳에서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위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더욱 열을 올려서 어떤 날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루 종일 그 일에만 매달리기도 했다.

남편이 무슨 말로 유혹했는지 제 아빠 앞에서 아들과 딸이 대화문을 외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묘기도 다 부렸다.

남매의 대화를 들으며 우리 부부는 얼마나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했던가.


아, 다 때가 있는 거구나.

세상에서 가장 싫은 과목이 영어라던 말이 무색하리만치 딸은 이제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과목이 영어가 됐다.(고 나는 느꼈다, 급기야.)

물론 내가 하루 종일 듣는 EBS 영어 방송도 한몫 톡톡히 했다고 늘 나는 주장하지만 남편은 그보다는 자신의 탁월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딸이 돌변한 거라고 자만하고 있다.(고 나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그곳에서는 연속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습하기를 권하며 오후 늦게까지 그 사이트를 방문하지 않으면 친절하게도 어서 들어와 학습하라고, 지금까지 학습한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셈이냐고 자극하는 말을 한마디씩 보내온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그날 학습량을 마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어 부랴부랴 공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 나는 에메랄드 등급에서 14위다. 하지만 등수 같은 것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종종 딸은 내 등수를 확인하고는 늘 나를 질책(?)한다. 등수가 그게 뭐냐며...

어쩌다 한 번, 가끔은 정말 너무 정신이 없다거나, 완전히 깜빡했다거나 해서 그동안 몇 번 빠뜨린 적은 있지만(다 합해 봐야 700일의 기간 동안에 일주일도 안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700일까지 이어온 걸 보니 나의 꾸준함에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할 거면 하고 안 할 거면 말고.

나는 좀 그런 성향이 있다.

물론 항상 그렇지도 않지만 독서나 공부 면에서는 좀 그런 편이란 말이다.

수학은 무슨 몹쓸 역병 보듯 해왔지만(수학은 아무리 봐도 답이 안 나온다는 게 내 구차한 변명이다.) 다행히 영어 공부를 하는 일은 재미가 있다.

재미있으면 말 다 한 거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재미있다.

특히 평소에 배운 표현을 퇴근한 남편에게 시의적절하게 써먹을 때(대개가 그를 향한 불만의 표현이라든가 못마땅한 점에 대한 강한 표출이라든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태도에 대한 게 거의 전부란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런 표현은 한 번 익히면 절대 잊히지 않는 마법적인 힘을 가졌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면 그렇게 보람차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남편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을 때면 더욱 그렇다.(는 건 나만의 비밀.)

더구나 작년에 근무지를 옮겨서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손을 놓고 있는 남편에 비해 우리 세 멤버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루에 단 5분, 10분이라도 심지어 일요일에 교회는 안 나가더라도 그 사이트는 방문해 왔으므로 우리끼리만 아는 표현을 남편 앞에서 재롱잔치 하듯 한 마디씩 하며 복습할 때의 그 뿌듯함이라니!

나 같으면 그 표현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라도 공부할 텐데 남편은 그런 궁금증 같은 것은 진작에 버린 듯하다, 기원전 1억 년 경에.


"우리 아들 딸,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꾸준히 공부하는 거 보면 엄마는 정말 너희가 자랑스러워. 처음엔 힘들었지만 그래도 매일 꾸준히 하니까 그렇게 어렵게 안 느껴지지? 엄마는 새로운 표현을 배울 때마다 정말 재미있더라."

라고 한껏 남매를 띄워 준 후에 내가 아는 칭찬의 표현들을 전부 쏟아 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물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정말 어찌 아니 즐거울 수가 있겠는가.

사는 게 정말 즐겁다.

뭐든 알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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