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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30. 2024

남편만은 모르길

언젠가는 발각될 일

2024. 1. 24.

< 사진 임자 = 글임자 >


"오늘은 이발이 잘 안 된 것 같네?"

"뭐가?"

"왜 이렇게 하얗지? 머리숱이 없어서 그런가?"

평소엔 그냥저냥 넘어가던 양반이 제는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휩쓸려서는 아니 된다.

일단은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만에 하나 내가 저지른 일을 알게 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발이나 할까?"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편히 원하는 시간, 원하는 공간, 원하는 날짜에 세상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이발을 하는 그 양반은 전혀 (무면허+나이롱) 이발사의 스케줄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이발을 요구했다.

나이롱 이발사에게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양반에게 이발을 해줘야 하는 3주 간격이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3주라는 기간은 마치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나선 아이들이 돌아서자마자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섭고도 빠르게 닥쳐왔다.

일요일까지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게 몸살감기에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겠더니 어제 아침에 약도 먹고 주사도 맞았더니 손놀림을 좀 할 수 있게 됐다.

이발은 원래 지난 주말에 해치웠어야 하는 숙원 사업이었지만 항상 '오늘 못하면 내일'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사는 그 양반은 금요일에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 보통은 주말에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나는 이왕이면 금요일에 이발을 하려고 하고 그 양반은 최대한 미루려고 하다 보니 이런 상황도 생기는 것이다. 멀쩡하던 아들이 금요일 저녁부터 시름시름 앓아누웠고 그 영향으로 토요일 밤부터 내가, 일요일 밤부터는 딸이 사이도 좋게 차례차례 감기 몸살을 앓았던 것이다.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누워만 있던 내게

"이발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라고 본인 헤어 스타일만 걱정하는 사람이 그 양반이다.

이 인간아, 지금 내가 몸져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데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그러게 내가 하자고 할 때 얌전히 자리 잡고 앉았어야지.

날이면 날마다 오는 이발사인 줄 알아?

"이발 하루 이틀 늦어지면 뭐 어때? 이발을 못해서 단발머리가 될 때까지 길더라도 난 당신 몸이 낫는 게 먼저야. 이발 그까짓 거 며칠 있다가 해도 세계 평화는 안 깨지고, 세계 경제가 휘정거릴 일은 절대 없으니까. 당신이 얼른 나아야 할 텐데."

라는 그런 침 잔뜩 바른말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일요일에도 어떻게든 나보고 이발을 해달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평소 그 양반이 주던 이발비를 두 배로 파격적인 금액을 제안하며 '이발 좀 해 줄래?'라고 넌지시 물어봤던들 결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물론 (그럴 리는 절대 절대 없겠지만) '이발비 10배로 줄게. 제발 이발 좀 해 줘.'라고 부탁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확실히.

당장이라도 이발기를 챙기고 이발보를 그 양반 목에 휘리릭 둘러 줄 마음은 충분히 있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몸살감기에 앓아누운 나이롱 이발사) 아내는 강하다'는 그런 속담도 있지 않은가.

사람은 가끔 어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참에 내가 그 힘을 보여 줄 수도 있었으련만...


어쨌거나 나는 이발에 착수했다.

그런데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찰나의 실수로 왼쪽을 너무 많이 밀어버렸다.

"어떡해, 너무 많이 잘랐나?"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온 말을 듣고도 그 양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그냥 대충 해. 내가 언제 그런 거 따졌어?"

아니,

실체를 알면 따지게 될지도 몰라.

따질 수준의 일이 돼 버렸어.

아마 주위에서 줄기차게 제보해 줄지도 몰라.

그럴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드는걸.

오른쪽은 그나마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만) 자연스럽게 이발된 것 같은데 왼쪽이 문제였다.

이번엔 살짝 파고들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한 부분이 살짝, 아주 살짝(이라고만 주장하고 싶다) 파였다.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너무 티가 난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순식간에 핫스폿을 만들어버렸다.

이건 내 솜씨 탓이 아니야.

아마 (신빙성도 없어 보이지만) 약을 먹어서 그런 걸 거야.

아니 어쩌면 이틀 동안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너무 안좋아서 그럴 수 있어.

평소답지 않게 실수가 많다.

오른쪽은 대체로 무난한데 왼쪽이 문제로세.

실수한 걸 무마하려다 보니 더 엉망이 됐다.

그러나 당황해서는 아니 된다.

"이상하네. 왜 여기가 이렇게 하얗지? 내가 머리가 많이 없어서 그런가?"

머리를 감고 나오자마자 그 양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난히 오랫동안 거울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말했다.

섣불리 대응해서는 아니 된다.

일단은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다.

"오른쪽은 안 그런데 왼쪽이 유난히 하얗네."

그렇겠지,

그게 머리숱이 문제가 아니라 밀어 버렸어, 내가...

고의는 결코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게 하얗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머리 살이야, 살. 살이 보이는 거야.

미안해, 양심상 나도 뻔뻔하게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는 말 못 하겠어.

나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고생했어. 이발비 보내줘야지."

라고 말하며 이내 평정심을 찾은 그 양반이 15,000원을 입금해 줬다.

이번만큼은 오히려 내가 그에게 돈을 줘야 할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양심고백이다.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양심적인 걸까?

하지만 생각만 하기로 한다.

원래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생각대로 다 실천하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너무 철두철미하면 인간미가 없어서 못쓴다.


한마디로 어제 이발은 망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 양반 눈이 옆이랑 뒤에는 달리지 않아서.

얼굴에만 눈을 만들어 주신 조물주의 섬세하고도 자비로운 마음에 나는 그만 감동할 뻔했다.

그러나,

눈이 앞에만 달린 그 양반을 위해 옆에서 보고 뒤에서 보는 팀원들이 있을 텐데, 이를 어쩐다지?

저녁이 오는 것이 두렵다.

그 양반이 퇴근할 때 어떤 비보를 들고 올지 심히 걱정스럽다.

도대체 이발이 그게 뭐냐고 다짜고짜 따지고 들기 전에 미리 이불 뒤집어쓰고 자리보전 하고 누워버려야겠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선수 친다'라고 한다지 아마?

마침 나는 아직 감기 몸살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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