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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Feb 18. 2024

생크림을 만들려거든 드릴로 만드세요

가성비가 부른 노동

2024. 2. 16.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제 느낌이 와. 부드러워졌어!"

퇴근길에 난데없이 휘핑크림을 사들고 직장인이 환희심에 넘쳐 소리쳤다.

"진짜 된다 , 아빠. 신기하다."

두 어린것들이 옆에서 덩달아 신났다.


어휴, 결국 하긴 했구나.


"아빠가 직접 생크림을 만들어서 먹으려고 휘핑크림을 사 왔어, 얘들아. 특별히 식물성으로."

생크림 장사를 나가려고 그러시나, 저렇게 많이 사서 언제 다 먹으려고 그러시나.

전부터 그 직장인은 내게 노래를 불렀었다.

"생크림 만들어진 거 사지 말고 직접 만드는 건 어때?"

가뜩이나 어깨도 아프고 손목은 더 아픈데 나보고 백만 년 동안 저으라는 건가?

"그거 엄청 많이 저어야 돼. 쉬운 거 아니야."

일단 조금 과장해서 거부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나는.

"에이, 그냥 하면 되지. 뭘 사서 하면 되지? 사 먹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 먹으면 좋잖아. 사면 양이 얼마 되지도 않잖아."

"날마다 먹는 거 아니니까 필요할 때 그때 한 개 정도 사 먹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는 내 생각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그 직장인은 본인이 합리적이라고(투입 대비 산출을 따지자면) 생각했다.

그런데 기어코 일을 냈다.

남이 하는 건 무조건 쉬워 보이는 그 직장인은 어쩔 땐 무조건 덤비는 경향이 있다.

생크림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그냥 저으면 되잖아?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젓는 과정이 힘들다 이 말이다, 내 말은.

물론 도구를 사용해서 최대한 힘을 안 들이고 만드는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일단 나는 그 직장인에게 '생크림을 집에서 휘저어 만드는 일은 무척이나 고된 노동'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그 직장인 말마따나 하면 되긴 되겠지, 하지만 힘들겠지.

생크림 그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다.

정 먹고 싶으면 일 년에 한두 번 사 먹으면 되지 않을까.

참고로 그 직장인은 식빵에 생크림을 듬뿍 발라 먹는 것을 좋아하신다.

빵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고 생크림도 그다지 건강하게 느껴지지 않아서(일단 너무 달다) 나는 최대한 빵도, 생크림도 안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직장인이 옆에서 먹고 있으면 철없는 두 어린것들이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만 할 것이다. 어차피 내 말 같은 건 듣지 않을 사람이므로 내가 먹어라 마라 할 것도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굳이 꼭 그 두 가지를 먹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물론 최대한 음식을 가려 먹으려는 나도 홑몸이긴 하지만 가끔 그 요망한 두 가지가 생각날 때도 있다. 아이들 생일이나 그 직장인의 생일 같은 날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생크림을 사 오기도 한다.


"아빠, 과연 이게 생크림으로 변할까?"

"아빠가 찾아봤는데 휘핑크림을 사서 저으면 생크림이 된대."

딸은 제 아빠와 만담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아빠, 내가 찾아볼게, 생크림 만드는 법을 검색해 봐야지."

아들은 그 와중에 태블릿으로 영상을 찾고 있었다.

"많이 저으면 돼."

하긴, 생크림 집에서 만들어 먹고 죽은 구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긴 하더라. 이왕 산 거 만들어 보시겠다는데 나는 고급 정보를 줬다.

"얼마나? 계속 저었는데 잘 안되는데?"

순진한 직장인은 생크림이 거저 만들어지는 줄 알았나 보다.

쯧쯧, 저리 세상 물정을 몰라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꼬?

"얼마 안 저어도 돼. 그냥 한쪽 팔이 빠질 만큼만 저으면 돼. 그것도 미친 듯이 빨리."

그 직장인이 속도를 냈다.

"너무 힘들다. 다음 누구 할 사람?"

딸과 아들이 사이좋게 바통을 이어받았다.

"아빠, 진짜 힘들다. 더는 못하겠어."

이탈자가 생기려는 찰나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 아빠 드릴 있으니까 그걸로 하면 되겠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드릴이 동원됐다.

재주도 좋았다.

티스푼을 고정해서 젓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면적이 더 넓은 것을 사용했을 텐데...

"아빠, 한쪽 방향으로만 저어야 된대."

라는 아들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한 방향만 고집하는 지고지순함까지 다 보였다.

그 직장인이 힘들다고 하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내 두 아이들이 팔이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자 내가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렌더에 쓸 수 있는 거품기 아랫부분만 있는 것을 꺼내왔다.

"티스푼으로 어느 세월에 한다고 그래? 이걸로 해."

"아니 이렇게 좋은 게 있었으면서 왜 이제 줘?"

다소 나를 원망하는 투로 신문물을 접한 직장인이 잽싸게 받아 들었다.

과연 그 도구는 제 역할에 충실했고, 제법 그럴싸한 생크림이 만들어졌다.

"역시 사람은 도구를 써야 돼, 그렇지 얘들아?"

아니, 그 전에 머리를 더 잘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못 미더워했던 내게 전리품이라도 선보이듯 새하얀 생크림을 빵 위에 바르며 직장인이 우쭐댔다.


"진짜 되네, 아빠."

"아빠 말대로만 하면 돼. 이렇게 하면 더 많은 생크림을 집에서 먹을 수 있지. 이거 산다고 생각해 봐. 얼마겠어? 벌써 3,000원어치는 만들었을 걸? 가성비를 따져 보자. 얼마나 이득이지?"

"내가 계산해 볼게. 그럼 전체 휘핑크림에서 우리가 5분의 1 정도를 지금 썼으니까 앞으로 5분의 4가 남았네. 5분의 1이 3,000원이라고 하면 앞으로 12,000원어치 정도 더 먹을 수 있겠네? 그런데 이걸 사서 먹는다고 생각해 보면..."

그 와중에 올해 4학년씩이나 되는 아드님께서 생크림을 앞에 두고 수학을 접목하셨다.

무작정 휘젓기만 하다가 드릴에 스푼에서 거품기까지, 도구를 사용한 용한 직장인보다도 나는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까지 해 낸 내 아들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뉘 집 아들인고?

그리고 집에, 이미, 블렌더가 있으니 처음부터 힘들게 젓지 않았어도 됐었다고, 굳이 드릴(생크림 만드는데 드릴이라니 모양새가 조금 거시기 했다,  물론 나만)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고, 세상 편한 방법이 있었노라고 그런 말은 직장인에게 절대 절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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