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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Feb 29. 2024

비와 (막무가내) 당신

어쩌면, 큰 그림

2024. 2. 28.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 하루 쉬고 여행이나 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애들 방학 때 어디 여행도 못 갔는데 한번 갈까 해서."

"그러면 미리 말했어야지 왜 항상 갑자기 결정을 해?"

"그냥 가면 되지."

"그냥 가는 게 어딨어? 그래도 나름 계획도 짜고 준비도 하고 그래야지."

"당일치기로 갔다 오면 되지, 복잡할 거 뭐 있어?"

"아무리 당일치기라도 그렇게 느닷없이 가자고 하면 어떡해?"

"그냥 가지 뭐."

"요즘 피곤하다며? 피곤하면 그냥 하루 쉬어. 여행은 안가도 돼. 나중에 따뜻해지면 가도 되고. 당장 안가도 된다고."


이 양반은 정말 하루살이 인생인가? 앞, 뒤는 없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고만 하잖아?

제발 미리 생각을 하고, 미리 계획 좀 짜라고 이 양반아!


그 양반이 느닷없이 하루 여행을 가자고 했다.

옛날에는 호환, 마마, 불법 비디오테이프, 호랑이가 가장 무서웠다지만 2024년을 사는 어느 아내는 막무가내로 여행을 가자고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그 양반 입에서 나오는 '당일치기'라는 말이 가장 무서웠다.

"생각을 해 봐. 이렇게 갑자기 어디로 갈 건데?"

"아무 데나 가면 되지."

"그러니까 아무 데나 어디?"

"이제 알아보면 되지."

"벌써 알아보게?"

"그냥 가면 돼. 계획 없이 가는 여행도 나름 괜찮잖아."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그것도 좋지. 갑자기 목적 없이 가는 여행도."

"난 전혀 안 좋아. 본인만 좋겠지. 계획까지는 못 세우더라도 미리 생각은 하고 있어야지. 그래야 준비를 하지."

"준비할 거 없어. 그냥 가면 돼."

"본인이야 준비할 거 없겠지만 난 준비할 게 많다고. 제발 미리 말 좀 해. 왜 항상 마음대로야?"

"이제 당신 기분 전환 겸 가자고 그런 거지."

"내가 언제 기분 전환 시켜 달란 적 있어?(=결정적으로 같이 나가고 싶지 않다=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질 것 같다)"

"왜 그래? 난 당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내 생각해주지 말라고 했지? 제발 내 생각 좀 하지 마!!!"

"난 당신 생각해서 그런 건데."

"누가 들으면 끔찍하게 부인 생각하는 남편인 줄 알겠네."

"나만큼 당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속 모르는 사람은 오해하기 딱 좋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좋은 소리야.

그냥 무조건 새겨듣기나 하셔.


다 좋다, 갑자기 쉬고 싶을 수도 있다.

이해한다.

피곤하면 굳이 여행 안 가더라도 그 양반 혼자 집에서 조용히 쉬라고 하고 나머지 세 멤버가 자리를 피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가기 전에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지 않은가. 나는 일단 날씨가 중요했다.

최소한 비는 안와야 하지 않을까? 내일모레가 개학인데 비 맞고 돌아다니다가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리면 어째? 나도 지금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닌데 여기서 더 아프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졌다. 올초부터 지독한 감기에 정말 학을 다 뗐다.

그 양반이 여행 얘기를 꺼낸 건 일요일이었고 그다음 주 화요일에 여행을 가자고 밀어부쳐서 급히 날씨를 알아보니 그 주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내내 비가 온다고 했다.

"인간적으로 날씨부터 알아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음 주는 계속 비 온다던데?"

"어? 진짜? 어떡하지?"

정말 이 양반을 어떡하지?

"에이, 그래도 비 오는 날 여행 가도 운치 있잖아."

퍽도 운치 있으시겠다.

나는 날씨에 따라 컨디션이 많이 좌우되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몸이 안좋아기지도 하는데 비가 온다니까 더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달아났다.

이런 게 어디 한 두 번이라야 말을 않지 내가.

"꼭 비 오는 날 나가서 운치를 즐기고 싶진 않아."

"왜? 당신 비 오는 거 좋아하잖아?"

"집에서 비 오는 걸 보는 걸 좋아하지 밖에서 비 맞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비 올 때도 괜찮은데..."

"그렇게 괜찮으면 혼자 가. 아무도 가자는 사람도 없었는데 또 혼자 저런다."

화요일에 하루 연가를 쓰겠다고 해서, 어차피 내가 말을 해도 안들을 사람이라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침 친구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는데 화요일을 말하길래 혹시 몰라 수요일에 보자고 했다. 화요일에 여행을 갈 수도 있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그렇게 친구와의 약속을 화요일로 잡았고 그 양반도 출근을 했다.

그런데 월요일에 퇴근한 그 양반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나 수요일에 연가 냈어. 어디로 갈까?"

이 인간이 정말!

지금 나랑  장난 하나. 화요일에 간다고 호들갑 떨 땐 언제고 또 혼자 마음대로 요일을 바꿨다.

"화요일에 가자며? 나 수요일에 약속 있어."

"안되는데, 우리 여행 가야 하는데."

"나한테 뭐라고 했어? 화요일에 가자며? 그때 쉴 거라며?"

"처음엔 그랬는데."

"하여튼 진짜 마음대로라니까. 난 내 친구 만날 거야."

"다음에 만나면 안 되나?"

"여태 날씨 좋을 때는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계속 비 온다니까 하필이면 그런 날만 골라서 여행 가자고 하더니 뭐 하는 거야, 지금?"

"어떻게 안돼?"

"돼도 안돼!!! 하여튼 진짜!"


친구와 만나기로 한 수요일에 갑자기 친구의 어린 딸이 열이 나서 내 약속은 무산됐고, 비는 일기예보에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렸고, 그 양반은 방에서, 나는 거실에서 나는 나대로, 그 양반은 그 양반대로, 비 오는 수요일에 빨간 장미 대신 따로국밥 부부가 되었다.

조신하게 독서를 하다가 나는 생각했다.

혹시 이거 그 양반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의뭉스러운 사람 같으니라고.

어차피 내가 안 갈 줄 알고,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비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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