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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02. 2024

벼락치기지만 괜찮아

중요한 건 행동 그 자체

2024. 3. 1.

< 사진 임자 = 글임자 >


"완전 너희 둘이 막상막하다. 이것 봐 봐."

과연 그런 일에 저런 사자성어가 적절한 것인지 약간 의문스럽기 했으나 일단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보기다.

실력 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달리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남매에게 손쉽게 와닿을 표현으로 나는 그 사자성어를 선택했다.

그 상황과는 좀 안 어울리긴 하지만 막상막하,

아마도, 마이너스 막상막하...


"얘들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저대로 학교 갈 거야? 인간적으로 가방 한 번 정도 빨아줘야 하는 거 아냐?"

겨울방학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가방 타령을 했고, 남매는 가뿐히 흘려 들었고, 순식간에 개학을 했으며, 일주일 만에 다시 봄방학을 했다. 그 사이 남매의 가방은 더욱 숙성되고 있었다. 어쩌면 발효를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된장, 고추장도 아닌데 굳이 계속 묵혀 둘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물론 나만)

"합격아, 가방이 더러워진 것 같다. 깨끗이 빨았다가 개학할 때 가져가는 게 어때?"

먼저 딸을 공략했다.

"에이, 엄마. 괜찮아. 어차피 나중에 또 더러워져. 그리고 더럽지도 않은데? 내가 보기엔 깨끗한데?"

어쩜 딸은 저렇게 초긍정적이란 말인가.

물론 딸 말마따나 선량한 미풍양속을 해칠 만큼 가방이 더럽진 않았다.

얼핏 보면 그다지 지저분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시력만 좋은 내 눈에는 자꾸 거슬렸다.

연필 자국, 뭔가 흘린 자국, 손때 묻은 흔적 이런 것들이 나를 동요하게 만들었다.(또 물론 나만)

"그래, 네가 괜찮다면 엄마가 뭐라고 하겠어, 어차피 네 가방인데."

"엄마, 이 정도는 괜찮아. 새 가방 같아."

아니, 솔직히 새 가방 같지는 않다.

"여름 방학 때 가방 빨아서 쓰니까 어땠어? 그때 정말 깨끗하고 좋았잖아. 이번에도 한 번 빨면 좋을 것 같은데 엄마 생각에는."

"그렇긴 했지. 그때 진짜 깨끗했어."

그러니까 그때의 그 기쁨을 다시 한번 누려보시라고 하는 말씀이다 이거야.

"근데 지금도 깨끗한 편이니까 안 빨아도 되겠어. 별로 안 더러워."

그래, 내 눈에만 지저분하게 보이나 보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빨고 싶은 마음은 없고 자꾸만 그 가방이 눈에 밟혔다.

일단 딸은 보류, 아들을 공략하자.

"우리 아들, 이제 새 학년도 되는데 개학 전에 가방을 깨끗이 빨아 보는 건 어떨까? 네 가방은 특히 색이 진해서 뭐가 묻었어도 티도 잘 안 나서 더러워도 더러운 줄 모르고 쓸 수가 있거든. 어떻게 생각해?"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빨면 되지. 내가 할게."

아들은 가끔 너무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여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먼저 가방을 비우자. 우리 아들 가방엔 뭐가 들어 있나? 아빠 옷에는 가끔 돈도 들어 있던데 한번 봐 볼까?"

아들 가방에서는 그러니까, 쓰레기만 나왔다.

"야, 넌 가방에 쓰레기만 담고 다니냐?"

딸이 한마디 했다.


"엄마, 진짜 벌써 물이 이렇게 더러워졌어. 그냥 봤을 땐 몰랐는데 진짜 더럽다."

아들은 흘러내리는 고무장갑을 연신 올려가며 가방 세탁에 열심이었다.

기회는 이때다.

실체를 보아야 한다.

딸을 호출해야 한다.

"합격아, 얼른 와 봐. 보여 줄 게 있어."

딸이 달려와서 동생 가방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와, 가방이 저렇게 더러웠어?"

제 가방도 만만치 않을 예정인데 동생 가방을 보더니 눈이 휘동그레지는 것이었다.

"이젠 합격이 네 차례야, 얼른 가방 비워 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딸이 가방을 탈탈 터는 소리가 들렸다.

"거봐. 겉보기에는 잘 모르는 거야. 네가 가방을 빨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더러운 줄 몰랐겠지? 이래서 직접 해 봐야 아는 거야. 근데 우리 아들 안 힘들어?"

"엄마가 그전에 고생한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어쩜 우리 아들은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하지만 나는 맹세코 아들 가방을 '그다지 자주' 세탁해 주지는 않았다.

아마 아들은 내가 시시때때로 제 가방을 세탁해 준 줄 알았나 보다, 그것도 손세탁으로.

"우리 아들 힘들겠다, 이제 마무리는 엄마가 할까?"

"아니야, 마무리도 내가 할게, 옛날에도 해 봤잖아."

작년 여름방학 때 남매는 처음으로 가방 세탁을 해 봤다. 전에 해 봤다고 이번에는 제법 요령도 생겨서 야무지게 가방을 빨았다.

"엄마, 이제 물이 깨끗해졌는데 그만 헹궈도 되지 않을까?"

"그래, 고생했어, 우리 아들. 힘들었지? 그래도 이젠 깨끗한 가방 가지고 다닐 수 있겠네."

"응. 힘들긴 했지만 진짜 깨끗해졌어."

솔직히 헹굼물이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도 힘들 것 같아서 그쯤에서 마무리 짓게 했다.

아들을 보내고 나는 다시 한번 가방을 세탁했다.

아들이 한다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어른이 하는 것만큼은 아니니 아들에겐 비밀로 하고 욕실 문을 닫고 남몰래 2차 작업에 돌입했다.

딸도 소환해서 가방을 직접 빨게 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구정물이 나왔다.

"합격아, 보니까 어때? 넌 깨끗하게 보인다고 했잖아."

"이거 보니까 아니네. 빨기 전에는 깨끗해 보였는데."

"거봐. 이래서 직접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벌써 색이 밝아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딸이 조물락거릴 때마다 때가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딸 가방도 아들 것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게 하고 내가 다시 한번 세탁을 했다.

이왕 하는 거 한 번 할 때 좀 더 깨끗하게, 이제 언제 다시 세탁할 날이 올지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그러다 불현듯 생각났다.

'가만, 빨래방에 갖다 주면 다 빨아 줄텐데 내가 왜 고생했지?'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사서 고생한다'라고 한다지 아마?

남매가 왜 그런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저희를 고생시켰냐고 나중에 따지면 이를 어쩐다?

따질 때 따지더라도 그건 나중에 닥치면 생각하기로 하자.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진작에 했으면 좋았겠지만, 비록 개학을 사흘 앞두고 한 벼락치기였지만 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제 등교일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이 정도면 완벽한 걸.

그런데 뭐지?

뭔가 부족한 이 느낌,

아뿔싸! 실내화를 깜빡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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