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Mar 10. 2024

그럴 땐 역시 아빠

2024. 3. 9.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빠, 오늘 '다있소' 갈 거야?"

딸은 다있소 찬양자다.

토요일 아침부터 제 아빠에게 자꾸 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곳에 가자고 졸랐다.

어? 위험한데?

저 발언은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특히 다있소를 사랑해 마지않는 어느 누구 앞에서는.


"다 있소에서 뭐 살 거 있어?"

"그냥 구경하는 거지."

"하여튼 우리 딸은 그런 데 좋아해."

"이게 다 아빠 닮아서 그렇지."

누가 아니래? 친딸이 확실하다.

나는 매번 쇼핑하는 일을 통해 유전자 검사를 한다.

하고 말 것도 없다.

쇼핑에 'ㅅ'만 발음해도 환호하는 이들이 우리 집 멤버들이다.

"우리 동전 노래방 갈까? 갈 사람?"

딸은 노래 부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침 그 양반이 바람을 조금 넣어놨기 때문에 딸이 열렬히 환호했다.

"당신도 갈래? 같이 갈까?"

나한테까지 바람을 넣으려고 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 법,

"아니. 난 안 가. 가더라도 혼자 갈 거야. 같이는 안 가."

이미 토요일 새벽부터 오만가지 일들을 하느라 반은 탈진한 상태였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그 양반은 집요한 면이 있다.

그래서 더 싫다.

한 번 싫다고 하면 싫은 줄 알아야 하는데 내가 괜히 한번 거절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양반 혼자만의 착각이다.

난 싫은 건 싫은 거지 좋아도 싫은 척하지는 않는 편이다.

내가 싫다고 하는 건 정말 싫어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백만 스물두 번이나 말해왔는데도 안 먹힌다, 기원전 1억 년 경부터.

같이 산 지 13년이 넘어가는데 여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이란 걸 못하시는 양반이다.

보아하니 본인이 지금 노래방에 가고 싶은 거다.

같이 갈 멤버를 찾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난 빠지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조신하고 혼자 책을 보고 싶었다.

"우리 아들은 갈 거지?"

아들을 포섭하려고 시도했다.

"난 안 가고 싶은데..."

안되는데, 아들도 가야 하는데, 아들이 가야 하는데, 그 어떤 멤버보다도 아들이 외출해 줘야 하는데.

"그럼 엄마랑 같이 집에 있어. 아빤 누나랑 같이 갔다 올게."

아들한테는 또 포기가 빠르신 양반. 이왕 나가는 거 두 멤버 다 데리고 나가면 좀 좋으냔 말이다.

혼자 있고 싶었다.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혼자 조용히 책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하긴 더 욕심을 부려서는 아니 되리.

그 양반이 나가 준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노래방 타령을 하더니 오후 4시가 다 되도록 그 양반은 요지부동이었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나간다는 게지?

"노래방 간다며, 안 가?"

"응. 가야지."

"언제? 노래방 문 닫고 나면?"

"이제 가야지."

그때서야 그 양반은 나갈 채비를 했다.

물론 아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다시 한번 줬다.

"진짜 안 갈 거야? 같이 가자."

"그럼, 그럴까?"

다행히(?) 아들이 수락했다.

그리하여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가 노래방으로 향했다.

이미 오후 4시가  넘었다.

자고로 노래방을 가기에 늦은 때란 없다.

토요일 오후, 외출하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다.

아무렴.

오후 4시면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기 딱 좋은 황금시간대지.

멤버들이 잠시라도 집을 비워주면 어느 때라도 된 거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집에 있으면 시간 많잖아. 일도 안 하고 맨날 집에 있으면서."

라고 본전도 못 찾을 소리를 자주 하시는 양반이 우리 집에 거주하고 있지만, 사실 엄밀히 그의 말은 그냥 그 양반 혼자만의 오해다. 아마도 본인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본인이야 퇴근하면, 쉬는 날이면 집에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서 안정을 취하고 뭔가를 보고 그렇게 지내는 편이지만(직장생활을 하는데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 그것 가지고 내가 뭐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렇지가 않다.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맨날 집에서 본인이 지내는 것처럼 있는 게 절대 아니란 점을 간과한 실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한 번씩 하기는 한다.

그럴 때마다 그 양반은 날마다 혼자 있으면서 왜 혼자 있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해할 수 없어한다.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서로 결론이 나지 않아서 적당한 선에서 매듭짓기 일쑤다.

나머지 멤버들이 집에 없다고 해서 내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또 하게 되지만 그래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거다.

백날 전날 말해봐야 못 알아듣는 양반이라 더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자고로 인연 없는 중생은 구제하기 힘들다 했으니...


"역시 아빠랑 같이 가길 잘했어. 엄마랑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남매가 햄버거를 들고 오며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엄마는 집에서 만들어 주지. 이왕이면 너희한테 건강하게 먹이고 싶으니까."

아빠는 집에서 안 만드니까 사 주는 거고, 엄마는 안 사주니까 집에서 만드는 거고.

아마 만 10살, 12살 남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 먹은 햄버거를 다 세어도 1인당 10개도 안될 거다.

그런데 갑자기 웬 햄버거람?

햄버거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은데...

아, 맞다!

그 양반이 아침부터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더니 기어코 샀구나.

덕분에 남매에게 인심도 얻고.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거구나.

꿩 먹고 알 먹고, 노래방 가고 햄버거 먹고.

너도 나도 다 좋다는 얘기다.





작가의 이전글 남편이랑 꼭 안 그래도 되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