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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11. 2024

여자친구 사귈래? 군대 갈래?

단둘이 남을 때

2024. 3. 10.

< 그림 임자 = 익명의 어린이 >


"어째 엄마 말투가 좀 거시기 하다?"

"뭐가?"

"엄만 나랑 같이 있는 게 안 좋아? 말투가 왜 그래?"

"아니야. 오해야. 좋아, 좋다고. 우리 아들이랑 단둘이 있을 생각에 너무 좋아서 그래."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하얀 거짓말'이라고 한다지 아마?


"안 가면 우리끼리만 간다. 진짜 안 갈 거야?"

아빠가 꼬드기고 누나가 꼬드겨도 의지의 한국 어린이는 꿈쩍도 안 했다.

제발 꿈쩍 좀 해줬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건 내 욕심이었다.

토요일에 나를 제외한 세 멤버가 잠시 집을 비워줘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일요일 오후에도 딸이 외출을 제안해 나는 속으로 '행여나' 혹은 '제발' 했다. 이번에도 제발 아들도 거기에 끼워 달라고.

하지만 그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연속 이틀 아들이 외출을 하는 그런 행운은 내게 오지 않았다. 가당치도 않게 과욕을 부린 거다.

반드시 외출을 해줘야 하는 멤버가 바로 우리 집 최연소자인 그 멤버인데 이런 엄마 마음도 모르고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잘하면 넘어갈 것도 같았지만 아들이 가든 말든 별 상관없는 그 양반은 아들을 설득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고 누나는 동생이 한 번 안 가겠다고 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저 혼자 나갈 채비를 마쳤다. 무정한 어린이 같으니라고.

그 양반과 딸이 현관문을 나서자 아들이 내게 바짝 다가앉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엄마랑 나만 집에 남았네."

이러면서 옆에 딱 달라붙는 게 아닌가.

평소에도 애교를 부리며 옆에 찰싹 달라붙는 만 열 살 어린이는 완전 자석 수준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랑해서 그렇단다.

엄마를 사랑해서 그렇단다.

사랑해서 그런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가끔 좀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어서 빨리 여자친구라도 생겨야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들은 '여자 친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셨다, 아타깝게도.

그렇다면 군대에 가야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나는 가끔 생각한다, 여자친구가 생기는 게 빠를까 군대에 가는 게 빠를까.

"엄마, 우리 둘만 집에 있는데 이제 뭘 하지?"

아니,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각자 볼일 보면 안 될까?

"어휴, 그러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버렸다.

이를 놓칠 리 없는 어린이가 바로 내 아들이다.

"근데, 엄마. 왜 한숨이야? 엄마는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아들이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거야? 태도가 왜 그래?"

"내가 뭘?"

"나랑 같이 있는 게 안 좋은가 보네, 엄마는."

"아니야. 좋아, 좋다고."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을 의미한다는 걸 아직 그 어린이는 모를 테지?

하지만 내 태도에서 그 어린이는 모든 걸 다 진작에 눈치채버린 것이다.

"엄마가 그럴 줄 몰랐어. 난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좋은데 엄마는 안 그런 것 같네?"

"아니라니까. 엄마도 우리 아들이랑 단둘이 있을 생각에 너무 좋아."

"그런데 아까 그 태도는 뭐야?"

"그건 네가 오해한 거야. 엄만 우리 아들이랑 단 둘이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아."

"그래? 그럼 이번엔 내가 그냥 넘어가 주지."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그럼 이제 엄마랑 뭘 하지?"

이를 어쩐다? 난 너랑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엄마, 뭘 할까?"

꼭 뭘 해야 할까?

"엄마, 엄마는 아들이 말하는데 왜 집중을 안 해?"

또 눈치챈 것 같다.

눈치 하난 정말 빠르다.

확실히 그 양반은 안 닮았어, 그런 면에서는.

"엄마 할 일 많은데..."

사실이었다. 내가 할 일은 언제나 많았다.

"엄마, 내가 그린 그림이야, 봐봐."

아들이 슬슬 시동을 걸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는 순간이다.

"엄마는 어떤 게 제일 맘에 들어?"

너 댓 장의 그림을 들고 내 옆에 다가앉은 아들은 무조건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르라고 강요했다.

그림이 그게 그것 같은데 다 비슷해 보이는데 자꾸 뭘 고르라는 건지.

"다 잘 그리긴 했는데 엄만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

몇 초 만에 내가 한 장을 골라버리자 그 어린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엄마, 그림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그렇게 빨리 고르는 게 어딨어? 잘 봐봐. 아들이 그린 그림인데 왜 그렇게 성의 없이 그래?"

가끔, 그 어린이는 너무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 뜨끔하고 양심에 찔릴 때가 있다.

아까 그 그림이 이 그림인데, 아들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좀 오래 들여다보는 시늉은 해야 한다.

"다 잘 그려서 뭘 고를지 모르겠네.(=시간아 빨리 가라)"

"엄만 그게 문제야. 다 잘 그리긴 뭘 다 잘 그려. 설마 지금 고르기 귀찮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야. 정말 다 잘 그려서 그래."

"진짜야?"

"응, 진짜야. 그게 제일 잘 그렸어. 됐지?"

"아직 안 끝났어. 그 그림을 뭘 보고 그렸는지 비교해 보면서 봐야지. 기다려 봐."

"꼭 봐야 돼?"

"엄만 지금 또 귀찮아서 그런 거야?"

"아니야. 안 귀찮아. 그래, 보자 봐"

아들은 세상 열심히 원본을 찾아서 내게 설명을 했다.

"봐봐 엄마, 어떻게 다른지. 어때? 알겠어?"

아니, 모르겠다, 모르고 싶다.

"엄마, 지금 보고 있는 거 맞아? 집중해 집중!"

집중이 안된다.

"엄마는 그게 문제라니까."

엄마가 그게 문제면 그럼 네 문제는?

"엄마, 이제 내가 다른 그림 그릴 건데 어떤 걸로 할까? 엄마가 골라 봐."

아니, 안 고르고 싶다.

그냥 너 하고 싶은 걸로 마음대로 골라.

"엄마는 우리 아들이 그린 건 다 좋아. 아무 거나 그려도 돼."

"엄마, 설마 그림 고르는 것도 지금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귀신같이 눈치 하난 정말 빠르단 말야.

"엄마, 다 그렸어. 이번엔 30분 밖에 안 걸렸네."

난 A4용지가 아니라 A0 용지를 구비해 놨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들, 이젠 책 보는 게 어때? 엄마가 추천한 책 있잖아."

"그럼 그럴까?"

응, 제발 그래라.

"그럼 엄마가 추천한 거니까 한 번 읽어 볼까?"

그 책을 다 읽으려면 반나절도 더 걸릴 거다.

아들이 책을 보는 동안은 내게 자유 시간이 주어지겠지? 그러는 사이에 그 양반도 딸도 집에 돌아오겠지? 그러면 비로소 나는 해방이겠지?


옛날에는 호환, 마마, 불법 비디오테이프, 호랑이가 무서웠다고 하지만, 요즘엔 보이스 피싱이 귀신보다 더 무섭다지만, 일요일 저녁 할 일도 많은 어떤 어머니는 아들과 단둘이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이래서, 이래서 내가 한숨을 쉰 거야.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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