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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09. 2024

남편이랑 꼭 안 그래도 되죠?

아직 길일을 못 만났을 뿐

2024. 3.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가씨, 집에 양배추즙 갖다 놨어요. 고모부랑 같이 드세요."

"꼭 그래야 돼요?"


며칠 전 둘째 새언니가 연락을 했다.

평소에도 먹을거리를 우리에게 잘 보시하는 새언니는 그날도 우리 친정에 우리 가족 몫을 또 따로 챙겨놓고 갔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양반과 같이 먹으라는 마지막 말에 나는 당장 항의하며 답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에 양배추즙 있는데.(=좀 무거워서 그러는데 그거라도 좀 갖다 주면 좋을 텐데)"

어느 날, 퇴근한 그 양반에게 내가 한마디 했다.

"급한 거 아니잖아?(=나는 지금 그 양배추즙을 당신 차에서 수거해 오지 않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 양반은 뻔히 예상했던 대답을 했다.

"급하다고는 안 했어. 그냥 있다고만 했지.(=차에 있으니까 언젠가, 손 없는 날을 택해서, 길일을 하루 골라서 제발 좀 갖다 줄 수 없어?)"

정말 나는 급할 게 하나도 없었다.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 양반의 태도는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

하긴 언제 당장 벌떡 일어나 행동으로 옮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하루 이틀 겪어 봤나 어디?

양배추즙을 친정에서 가져오던 날 엄마는 내게 신신당부하셨다.

"O서방한테 들고 가라고 해라. 그것이 즙이라 무겁다."

"알았어.(=어느 세월에 할지는 모르겠지만 입은 한번 뻥끗해 보겠수)"

싣고 오기는 했는데 눈에 안 보이니 생각도 안 났다.

그런데 갑자기 배즙을 마시다 생각이 난 것이다.

아침에 내가 카트를 끌고 가져오려고 했었는데 그만 깜빡했다.

차에 며칠 재워둔다고 해서 큰일은 안 날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방치하다가 차 폐차하러 갈 때까지 싣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언니가 양배추즙 줬어. 누구랑 같이 먹으라고 하면서."

"그래? 고맙네."

고마우면 좀 들고 오실 것이지.

몸에 좋은 것은 물불 안 가리고 다 드시는 분이라 새언니가 챙겨주는 많은 것들로 (내 덕분에?) 반사적 이익을 꽤 누리고 계신다.(고 나 혼자만 생각하고 있다.)

"양배추즙 언제 가져오지?(=당장 벌떡 일어나서 가져오지 못할까?)"

계속 소파에 늘어져 있던 그 양반을 보고 넌지시 말해봤다.

"언제 우리 아들 딸이 이렇게 컸지?"

동문서답만 했다.

지금 내가 양배추즙 운반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나머지 두 멤버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였지, 참.

묻는 말에 신경 안 쓰고, 전혀 상관도 없기까지 한 말을,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엉뚱한 대답만 해도 느닷없이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뭐.

양배추즙은 그냥 내가 이고 지고 와야지.

대신 손 없는 날로 신중히 골라서.

그거 얼마 되지도 않는 거, 20킬로 밖에 안 되는 거 그거.

하지만 나는 또 생각했다.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내가 차에 탈 때마다 야금야금 나 혼자만 한 봉지씩 축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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