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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05. 2024

첫 문장을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

불현듯 생각나는 날

2024. 5. 4. 박경리 문학관에서

<사진 임자 = 글임자 >


'행복한 가정은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저 첫 문장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밤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문장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적인 가르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말이다.

특히 결혼을 해서 자식을 둘이나 낳고 살면서부터는 불쑥 저 문장이 생각나곤 했다.

나는 특별히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꼭 행복해져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더군다나 없다.

어찌 보면 나는 행복보다는 '만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사는지도 모른다.

또 어찌 보면 막연한 행복보다 더 애매모호한 만족을 더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인지도.

내 마음이 편안한 것, 내 기준에 만족스러운 것, 고통이 없는 상태, 크게 미워하는 대상 없이 섣불리 판단하고 지레 집작하지 않고 사는 것, 정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내게 크게 해롭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는 선이라면 (자의든 타의든) 그러려니.


한때는 감히 한 기준을 놓고 지극히 내 개인적인 잣대를 들이밀곤 했었다. 이만하면 저 사람보다는 내가 그나마 낫다, 물론 나도 힘든 시기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덜하다, 나보다 더 큰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내려다보자 그러면 조금은 위안이 될 테니, 솔직히 이런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는 그게 대단한 신념이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여기저기 꿰어 맞추며 지금 나는 얼마나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지 자신만만했다, 우습게도.

가정을 꾸리고 살고 '반드시'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런 의문마저 생겼다.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그냥 나름의 우리 가정을 꾸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지극히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도 벅찬 감동을 느끼고 이런 게 행복인가 싶을 때도, 가족 중 누군가의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 한마디에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낄 때도 숱하게 많았다.

나는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 건가? 하지만 그건 가정을 이루기 전이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나만의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 큰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고 꼭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단지 시절인연이었을 뿐인지도.


나는 남과 그리 비교를 하며 사는 편은 아니다.

비교는 물건을 살 때나 필요한 거라고 우기고 싶을 지경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일뿐이라는 생각에, 동일 조건에서 동일인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불행도 그런 게 아닐까.

자신의 상황이 지금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 주위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성가시고 불만스러운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물론 한때(어쩌면 지금도 종종) 나도 그런 사람들의 부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가끔은 저 문장이 헷갈린다.

행복한 가정이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 같고, 불행한 가정이 모두 비슷한 이유로 불행한 것도 같다고.

그 와중에 나는 또 느끼는 것이다.

불완전한 채로 나는 만족스럽다고.

넘치지 않을 만큼 그걸로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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