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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25. 2024

아마, 우리 사이를 오해한 것 같아

연리지까지는 아니야

2024. 5. 24.

"엄마 아빠는 연리지네?"

어?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한자 강의를 보던 아드님이 갑자기 고요한 거실에서 한마디 하신 날이다.


"우리 아들, 갑자기 연리지가 왜 나와?"

"한자 공부하는데 나왔어."

분명히, 아니 아마도, 아니 확실히 '연리지'라는 말의 뜻을 아들은 모를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물었다.

난데없이 연리지라니, 연리지가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 싶었다.

"우리 아들은 연리지가 뭔지 알아?"

"당연히 알지. 내가 방금 공부했어."

"연리지가 뭔데?"

"그건 말이지, 엄마랑 아빠처럼 사이가 아주 좋은 그런 걸 말하는 거야."

"엄마 아빠가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 같아?"

어허,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럼! 그러니까 연리지라고 하지."

"그래. 그렇게 생각해 줘서 다행이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 일컫는 말로 알고 있었다.  남녀 사이나 부부사이가 아주 좋은 것을 두고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 표현은 그러니까,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어떤 이와 함께 살면서부터.

그 표현을 처음 알게 된 20년 전 이래로.

과거에도 그랬던 적이 없었고 현재도 그런 것 같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러기는 (아마도) 힘들 것 같다고도 생각해 온 터였다. 부부란 그저 너무 지나치지 않게, 많이 모자라지 않게 그냥저냥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연리지'씩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로 부부 사이가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20년 전이었던가, 저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는 철없던 때라 어떤 동경마저 했더랬다. 저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살다 보니(?)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일 뿐, 내겐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일 뿐이었다고 해야 맞겠다. 다른 부부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애써 그렇게 믿으면서.

나무는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그렇게 살기가 참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특히 부부 사이는 말이다. 설마 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런데 난데없는 아들의 '연리지' 임명에 뜨악해지고 말았다.

아들이 우리의 실체(?)를 아직은 눈치 못 챈 모양이군.

그나마 겉으로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썩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온전히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현실에 다소 안도했다고나 할까.

하긴 굳이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간헐적 불화를 광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13년을 산 부부가 얼마나 애틋할 게 있으며, 얼마나 간절할 게 무어 있을까 싶은 것이, 요즘은 그저 그런대로 되는 대로 적당히 눈을 감고 너무 얽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살아간다'.

솔직히 서로 죽고 못살아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반드시 서로였어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 이렇게 부부로 살고 있고, 자식들을 두고 그냥 사는 것, 딱 그 언저리인 느낌이다.


불가에서는 현생의 부부는 과거 전생에도 부부였을 확률이 높다고 했던가.

오백 생을 거쳐 다시 부부로 만난다고 했던가.

불현듯 나의 전생과 오백생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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