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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12. 2024

아버님이 나를 쫓아내셨다.

그것도 필사적으로

2024. 5. 6.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얼른 가, 얼른! 손도 대지 말고 가!"


어머님은 어디 가셨는지 안보였고 아버님이 무작정 나를 쫓아내셨다.

결혼 13년 만에 이렇게 며느리에게 강하게 나오신 건 처음이었다.

어머님이 어디 계시나 잠깐 마당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니 아버님이 다시 나를 밖으로 쫓으셨다, 어서 가라고, 빨리 가라고.


물론 아버님과 원수 진 사이는 아니다.

내가 보기 싫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비 때문이다.

강풍이 불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고, 하필 재난 안전 문자가 왔고, 밖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으며, 바람 또한 심상치 않게 불고 있었다.

막 이른 저녁을 시부모님과 같이 한 직후였다.

나는 우리 네 식구가 가서 가뜩이나 설거짓거리가 몇 배 더 늘어난 상황이라 설거지를 다 마치고 갈 생각이었다. 내가 먹었으니까 내가 치워야지.

그런데 아버님은 막무가내셨다.

"설거지는 할 생각도 하지 말고 얼른 짐 챙겨서 가."

"짐 챙기고 말 것도 없어요, 아버님. 가방만 들고 가면 돼요."

"비 오기 전에 가야지.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걱정이네."

"네, 온다고 하긴 했는데 저녁에나 올 것 같아요."

"그래도 비 오면 성가시니까 얼른 가야지."

"설거지 금방 해요. 제가 하고 갈게요."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처음으로 낯선 아버님의 모습을 보았다.

장갑도 안 끼시고 맨손으로 직접 설거지를 하시려고 하는 게 아닌가. 먼저 그릇에 살짝 물을 뿌리는 동작을 시작으로 이내 수세미로 그릇을 닦기 시작하셨다.

"아버님, 제가 할게요. 얼마 안 걸려요."

"됐다니까. 얼른 짐이나 싸."

짐은 진작에 어머님과 내가 몇 보따리 다 싸놨다, 기원전 3,000년 경에.

지난주에 안 가고 어제 갈 거라는 긴급 속보를 들으신 어머님이 다 만반의 준비를 해 두셨던 거다. 그러면서 어머님은 우리가 가고 나면 자꾸 빼먹은 것들이 있더라며, 어제는 시가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를 샅샅이 뒤져 내게 줄 오만가지 먹을거리들을 챙겨 두셨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아버님 혼자서 살림을 하시더니 음식도 해 드시고 설거지도 하셔서 그런지 제법 설거지 폼이 괜찮았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비가 온다고 해도, 10분 정도 설거지 마치고 간다고 해서 벼락 돌풍이 불지는 않을 테지, 아버님이 설거지하시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서 나는 자꾸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고 아버님은 그저 날씨가 심상치 않아 보이니까 운전하고 갈 일이 걱정이어서 자꾸 나를 쫓아내셨다. 나중에는 거의 화를 내다시피 하셔서 그냥 아버님 뜻대로 얼른 짐을 챙겼다.

얼마 후 어머님이 부엌으로 오시더니 놀란 눈으로 아버님께 한마디 하셨다.

"설거지 놔둬."

아버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내가 하고 있어."

하지만 어머님은 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기름기 있어서 안돼. 세제 묻혀야 돼."

"내가 다 묻혔어."

"그래도 놔둬."

"내가 한다니까."

"놔두라니까 그러네."

설거지거리를 두고 두 분이 서로 하시겠다고 상대방을 제지하시는 풍경을 다 목격했다.

그 광경을 본 며느리는 그냥 차라리 내가 얼른 해치우고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 어머님 모두 완강히 거부하셔서 두 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진심으로 어서 가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얼른 가라. 비 오기 전에. 운전 조심하고."

쫓겨나긴 했지만, 쫓겨난 것도 아닌 희한한 상황이라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걱정하실까 봐 당장 전화드렸다.

"어머님, 잘 도착했어요. 음식 맛있게 잘 먹을게요. 다행히 비는 얼마 안 오더라고요."

이때 조신히 운전하던 운전석의 한 남성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얼마 안 오긴 뭘 얼마 안 와? 비 많이 왔지."

하여튼, 낄 데 안 낄 데 다 끼는 어느 집 큰 아들.

장대비가 쏟아졌어도 안 왔다.

왔어도 안 왔다.

하는 대로 그냥 보고나 있을 것이지.

다른 건 모르겠고, 시부모님 복은 확실히 있는 게 맞다.

그거 하나라도 어딘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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