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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13. 2024

할 일 없는 가족의 일요일 사용법

우리 집에서만 흔한 풍경

2024. 5. 12.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그게 뭐지? 아이(I) 다음에 위에 점 같이 찍힌 거 아이드(I'd) 말할 때 말이야. 그 점이 뭐였더라?"

"응, 그건 '어퍼스트로피'라고 해."

"그게 어디 있지?"

"자판 오른쪽에 작은따옴표 있잖아. 그거 찾으면 돼. 속마음 표현할 때 쓰는 거 있잖아."

"어퍼 뭐라고? 뭐가 그렇게 이름이 복잡해?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한 거야?"

"엄마가 그런 거 아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아들이 갑자기 학구열에 불탔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겠다고 남몰래 생각했다.


"이상하다? 어제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불었는데 오늘 미세먼지가 왜 이렇게 심하지?"

딱히 일요일 일정은 없었지만 아침부터 뿌연 하늘에 눈이 답답했다.

또 하루 종일 네 식구가 집에 갇혀있게 생겼다.

느닷없이 아들이 일어나자마자 영어 사이트에 접속하면서 사건(?)은 발생했다.

"우리 아들, 학생이 지금 놀아야지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학생이니까 공부해야지."

나는 결코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말을 한 적이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만 종종 '할 일은 하자.'라고 말하곤 한다.

"일요일이잖아. 일요일은 좀 쉬어. 놀고, 늦잠도 자고 그래야지. 그래야 다음 주에 또 학교 다니지."

하지만 아드님은 나와 딸과 아들이 매일 하는 그 영어 사이트에서 로그아웃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으로만 흐뭇해할 뿐 적극적으로 내가 아들을 저지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지금은 공부하는 것보다 밥 먹는 게 더 중요해."

라고 나는 말했지만 출근을 하지 않은 우리 집 한 남성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또 끼어들었다.

"우리 아들, 정말 잘하네. 벌써 실력이 이렇게 는 거야?"

옹알옹알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드님은 '공부'라는 것(아마도 그 비슷한 것)을 하고 계셨다.

"아빠, 나도 지금 이만큼 했어."

라면서 딸이 제 노트북을 급히 가져와 아들 옆에 앉아 그 사이트를 열었다.

"우와, 합격아, 너 벌써 이렇게 진도 많이 나갔어? 엄마는 이제 806일 했는데 넌 얼마나 됐어? 나보다 한 달 정도 더 했나?"

"엄마는 레전드 했어?"

"응, 한 것 같은데? 근데 레전드가 뭐야?"

딸은 내 학습량의 몇 배는 더 많이 진도가 나갔다.

"세상에 만상에. 지금 펄 리그 1위네? 엄마는 걸핏하면 강등됐다고 알림 오던데. 봐봐. 우리 합격이가 펄 리그 1위야, 1위!"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 순위에 올랐다가 방심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마구마구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내 자리를 내어주기 일쑤였다.

'나는 순위 같은 것'에 전혀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딸은 달랐다.

순위에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았다.

"누나는 1등 했는데, 나도 1등 해야지."

갑자기 아들이 자극을 받았는지 1등을 향한 야망을 온 가족 앞에 드러내셨다.

"아니야, 우리 아들. 1등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재미있게 하면 그걸로 됐어. 1등 하고 싶어서 너무 거기 매달리면 그게 공부처럼 느껴지고 너도 힘들어. 재미도 없고. 어린이는 놀아야 한다니까"

"아니야, 나도 1등 할 거야."

그래, 내 계획대로 착착 잘 돌아가고 있군.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서는 안돼.

"그래도 지금은 밥 먹는 게 우선이니까 그만하고 밥 먹자. 우리 아들 일요일 아침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엄마. '애나' 스펠링이 뭐지?"

"Anna."

"아, 맞다."

"사람 이름이니까 앞에 에이를 대문자로 써야겠지? 고유 명사잖아."

"나도 알아."

어린이는 공부 같은 거 하지 말고 그저 놀아야 한다고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회만 있다 싶으면 나는 어떻게든 뭘 해보려고 한다.(는 걸 잘 안다, 아마 이건 엄마들의 본능인지도 몰랐다,라고 또 나만 혼자 생각했다)

이왕이면 알려줄 때 정확히 알려줘야지, 안 할 거면 말고, 좀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정확한 것을 전달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빠, 우리 퀴즈 내 보자."

갑자기 딸이 소파를 혼자 다 차지하고 누워있는 이에게 긴급제안을 했다.

나는 '모닝스페셜'을 듣다가 간간이 끼어들며 참여를 했고, 소파 위의 그 양반에게 자주 제지당했으며 그런 그 양반 말을 나는 매번 가볍게 흘려 들었다.

극성 엄마까지는 아니고,

이렇게 보니 나도 좀 유난은 유난이다.


오디오 어학당에서는 일주일치 영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남매는 이제 코딩을 한다며 각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파 위의 그 양반은 뭘 그리 집중해서 보시는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항상 보는 풍경이다.

이렇게나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미세먼지 따위 문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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