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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27. 2024

어린이의 반반

나머지를 구하시오, 제발

2024. 5. 26.

<  사진 임자 = 글임자 >


"넌 어떻게 할 거야? 반을 어떻게 쓸 거야?"

"당연히 나머지는 다 과자 사 먹어야지."

아들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 신이 나서 말이다.

"그래도 그 많은 돈을 다 과자 사 먹는 데 쓰면 좀 그렇지 않을까?"

"에이, 괜찮아."

나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나도 저 나이 때에 저런 생각을 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은 이미 '모닝 스페셜' 헤드라인 뉴스에 나왔던 기사를 '이브닝 스페셜'에서 같은 내용으로 한번 더 다뤘던 문제의 날이었다.

"미국 메사추세추에서 억만장자가 한 대학교에 예고도 없이 트럭을 끌고 갔대. 그리고 졸업생 수백 명한테 각각 봉투 두 개씩을 줬대. 하나는 기부를 하고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쓰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러면서 기부하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했대."

이미 들었던 기사였으므로 아이들은 대충은 아는 내용이었다.

매일 아침 20년도 넘게 나는 '모닝 스페셜'을 듣고 있다.

전 세계 뉴스 중에서도 흥미로운 기사들로 가득해서 비록 영어 뉴스이지만(당연히 한글로 해석을 친절히 해주시고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배울 수 있어 아파서 누워 있을 때에도 빼먹지 않고 듣고 있다) 영어 공부도 하고(물론 살짝, 간에 기별이 갈까 말까 한 정도로 아주 사알짝이다) 새로운 소식도 듣고 이런 게 바로 일석이조라며 혼자서만 흡족해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니 임신 전부터, 태교 할 때부터 지금까지 숙명처럼 나와 함께 듣고 있다.

아침밥을 먹으며 흘러나오는 뉴스를 가지고 잠깐 아침 만담을 하기에 딱 좋다고 (아마도 나 혼자만) 생각해 온 참이다.

아이들도 간혹 흥미를 가지고 끼어들면서 나와 얘기할 때도 있었으므로 나는 꿋꿋이 일어나자마자 EBS 반디를 켜는 것이다.

뉴스를 듣다가 내가 아들에게 돌발 질문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혼자만 다 쓰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학생들한테 기부도 하고 그걸로 다시 기부하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돈을 다 주고 말이야. 게다가 나머지 반은 자신을 위해 쓰라고 했다잖아. "

내 말을 듣던 아들이, 열심히 만화책에 빠져있던 아들이 불쑥 끼어들었다.

"진짜? 얼마나? 우와, 진짜 좋겠다."

"일인당 1,000 달러씩 줬대. 환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충 그냥 1달러가 1,000원이라고 치면 1,000달러면 얼마나 될까?"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아들에게 세상 쉬운 환산법을 질문했다.

"그럼 백만 원이 넘잖아? 그렇게 많이 줬대?"

"그래. 백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닌데 말이야. 그치?"

"받은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

"그러게. 반을 기부해도 50만 원이 넘게 남는데 그 돈도 적은 건 아니잖아. 우리 아들이라면 나머지 돈을 어디에 쓰고 싶어?"

라고 물었을 때, 아무 사심 없이, 아니 너무 순진하게도 내가 물었을 때 나는 이미 직감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어린이의 특성, 특히 과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남자 어린이가 대답할 법한 딱 초등학생다운 답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당연히 다 과자 사 먹어야지. 실컷 사 먹을 거야."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돈을 다 과자 사 잡수는 데에 탕진하리 가는 계획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 저를 낳고 기르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저라면 당연히 어머니부터 챙길 것입니다. 어머니 은혜 백골난망하여 마지않았던 바, 그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어머니를 위해 다 바치겠나이다. 제 것은 어머니의 것, 어머니의 것도 어머니의 것 아니겠나이까. 이것이 바로 자식 된 도리인 줄로 아뢰오."

라는 이런 대답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엄마, 전부 과자 사서 엄마랑 나눠 먹을 거야."

라는 정도의 말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들은 '무조건 다 과자를 사 먹겠다'라고 했지, 나와 한 봉다리라도 나눠 먹겠다거나 그 중 몇 봉다리는 내게 떼어 주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것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잠시 나는 내 아들이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을 깜빡했을 뿐이다.

"엄마, 난 그 돈으로 여자 친구랑 커플링 할 거야."

내지는

"그 돈으로 여자 친구 선물 사 줘야지."

라는 말보다는, 그나마 덜 쓰라렸다고 이제 와 고백하는 바이다.

"그래도 과자 말고 또 다른 쪽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을 위해서 쓰라고 했잖아."

"엄마, 그 돈 전부 과자를 다 사 먹는 게 나를 위한 거야. 엄마도 들었잖아. 자신을 위해 쓰라고."

"그래. 그게 널 위한 거라면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좋다."

아들은 꿈을 꾸듯 말했다.

"이 녀석아, 아무리 철이 없다기로소니, 그 많은 돈으로 다 과자 사 먹는데 홀랑 다 써버렸다는 걸, 아마 그 사실을 알면 그 억만장자가 줬던 것도 다시 뺏을지도(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몰라."

라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 같은 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이었구나.

그래서 초등학생 대상이 아니라 대학 졸업생이었구나.

다만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엄마, 무슨 소리야? 누가 과자를 50만 원어치 사 먹는다고?"

제 방에서 할 일을 다 마친 딸이 급히 오더니 '들은 소리는 있어서'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응, 너도 들었잖아. 뉴스 기사 말이야. 반은 기부하고 반은 자신을 위해서 쓰라고 하면서 억만장자가 대학생들한테 1,000 달러씩 준거 말이야."

"아, 그거?"

"우리 합격이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할 거야? 나머지 돈은 어떻게 쓸 거야?"

"당연히 스티커 다 사야지."

딸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쁨에 넘쳐 대답하셨다.

거짓 하나 없이 진실로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는 표정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딸은 요즘 '기승전스티커', 온통 스티커다.

아, 내가 남매에게 뭘 기대했던 거지?


아들의 반반.

반의 기부, 반의 쓸모

그러니까 남매의 반반은 그런 식이었다.

만약, 내게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어디다 쓸까?

잠시 비현실적인 상상에 괜히 들뜬 밤이었다.

상상 임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상상임신같은 건 아니 될 말이다.

상상 공돈(?), 다만 내가 지금 꿈꿀 수 있는 현실적인, 아니 어쩌면 세상 가장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스크로 가는기차,

그러면서도 그 기차를  한번 타보고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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