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지 윗사람이면 다야? 하여튼 공무원들 야구 좋아해. 걸핏하면 여기나 거기나 야구장 가재. 좋아하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나 갈 것이지 싫다는 사람을 왜 억지로 데려가려고 그래?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안 간다고 말이나 해 봐."
내가 말하고도 너무 멀리 간 거 아닌가 싶었으나, 이러다가 그 양반이 정말로 중대발표를 해버리면 어쩌나 잠시 아찔해지기도 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었다. 그냥 그 양반 장단이나 맞춰주자고 한 말이었다. 가기 싫다는데 억지로 끌려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가엾은 그 양반을 위로하는 셈 치고, 그러니까 그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입에 발린 소리 한다.'라고 한다지 아마?
"진짜 큰 일 있는 거 아니면 절대 못 빠질 거야."
"결혼한다고 해, 그날. 결혼한다고 하면 빼 주겠지."
"아마 그래도 안 빼줄걸? 갈 확률이 커."
당연히 그래야지.
100% 가야지. 남들 다 가는데, 그 윗분도 행차하신다는데 무조건 따라나서야지. 야구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 개인의 기호와는 전혀 상관없이 '친목 도모'를 위하여 가야지.
"무슨 사람들이 야구 보러 가면서 친목 활동한다고 하나 몰라. 나도 옛날에(분위기상 또 기원전 5,000경 내 과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내가 일을 그만둔 일에 대해 또 되새김질하면서 염장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이미 다 끝난 사안이었지만, 그래도 마침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냥) 첫 발령받고 면사무소 갔는데 출근한 지 며칠 만에 갑자기 단합 대회 하자고 전 직원 야구장 가자고 하더라. 난 갔다 오면 한 밤 중 될 텐데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급히 추진해 가지고 무조건 빠지지 말고 강제로라도 가야 한다고 그러면서 말이야.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부치는 거 정말 싫었어.."
"그랬어?"
"그랬다니까. 그땐 신규자라 가기 싫다는 말도 못 하고 제발 비나 쏟아지라고 빌었다니까. 근데 알고 보니까 나만 빼고 다 야구 좋아했나 봐. 안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어. 그전부터 다들 그렇게 다녔대, 직원들이랑 친목 활동 차원에서. 근데 나는 이해 안 되더라. 야구장에서 무슨 친목활동을 해? 그냥 핑계 아니야? 자기들이 가고 싶으니까 그런 것 같던데."
"당신이나 나나 야구 별로 안 좋아하지 좋아하는 사람 많아."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이왕이면 다 같이 좋아하는 거 하면 좋잖아. 하긴 의견 일치 보기도 힘들긴 하겠다. 나는 야구도 안 좋아하고 술도 안 좋아하고 사람들 많고 시끄러운 것도 질색인데, 집에서 조용히 혼자 책이나 보면 좋겠던데 말이야."
"나는 작년에도 몇 번이나 갔는지 모르겠다. 그전에 학교에 있을 때도 가고."
"하긴 전에도 매년 한 번 이상씩은 간 것 같긴 하다. 말이 좋아 친목 활동이지,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은 오히려 의만 상하겠어. 안 그래?"
"근데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하여튼 공무원들 야구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차라리 축구를 보러 가자고 하면 가겠다. 다른 면사무소 발령 났을 때도 직원들이 또 야구장 가자고 막 추진하고 그랬었는데 말이야."
'야알못'인 나는, 야구에 문외한인 나는, 정말 야구는 재미가 없었다.
뭘 알아야 재미도 있는 것인데 모르니까 재미가 있을 리가 있나.
이 정도 위로해 줬으면 됐겠지?
"아무튼 안 됐지만 잘해 봐."
"하여튼 언제 야구장 간다는 것만 알고 있어."
"그럼 갔다 오면 늦겠네?"
"응."
"좀 많이 늦겠네?(=이게 웬 횡재냐)"
"아무래도 그렇지. 경기도 밤에 끝나고 다시 집에 운전하고 오려면 밤 10시나 11시 되지 않을까?"
세상에, 이렇게 기쁠 데가!
"나 그날 늦을 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
"그래, 걱정 마. 몰라도 알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최대한 천천히. 들어올 때 요란하게 들어오지 말고."
옛날에 나보고 야구장 가자고 할 때는 야구를 철천지 원수 보듯 하였는데 그 양반 직원들이 단체로 이렇게 나를 위해 주니 이보다 더 흡족할 수가 없다. 전 우주가 나를 돕는구나.
내 친구 중에는 남편이 빨리 퇴근해서 집에 왔으면 하는 친구도 있는데 나는 정말 그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집에 시도 때도 없이 분유 먹여야 하는 신생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 기억에는 못마땅했던 친목활동, 그러나 지금은 남의 일이라 반가운 친목활동, 앞으로 그런 친목활동은 더 자주 했으면 좋겠다.(고 그 양반 몰래 비나이다,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