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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n 09. 2024

한 남자가 있어

한 여자 말만 안 듣는...

2024. 6. 7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당신 힘드니까 내가 할게."

라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부엌에서 '일을 벌이는' 남자.

정작 자신이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남자.

오로지 반찬으로는 달걀 후라이'만' 하는 지고지순한 순정파.

5년에 한 번쯤은 달걀에 양파씩이나 대충 썰어 달걀말이(라고 말은 하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달걀 요리)를 시도하는 남자.

언제나 드레스 코드는 '하얀 러닝 샤쓰'인 남자.

파프리카를 꼭지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아래로 내려와 가로로 썰어 버리는 남자.

"파프리카는 꼭지 아랫부분까지만 세로로 썰어서 꼭지 부분을 살짝 잡고 비틀면 깔끔하게 꼭지가 제거돼. 심지에 붙은 씨도 한꺼번에 제거되니까 세로로 써는 게 더 좋은데."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시범을 손수 보여주는 묘기 앞에서도

"가로로 썰든 세로로 썰든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남의 호의를 대놓고 거절하는 남자.

"요령을 알려주는 거잖아. 모르니까 알려주는데 또 듣기 싫어? 일을 더 쉽게 하라고 그러지."

라고 몇 마디 더하면

"그럼 진작에 알려 주든가."

라면서 한마디도 지지 않는 남자.

"수 백번도 더 알려줬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새겨 들어야지."

라는 말에는

"잔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

라고 도리어 역성을 내는 남자.

"알려 줘도 뭐라고 하네.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이왕 하는 거 쉽게 하면 좋지. 왜 한 번에 쉽게 할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일을 해? 가르쳐 주면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듣기 싫어하고, 대충 넘어가려고 하고. 무슨 말만 하면 잔소리라고 하고 말이야."

라며 사실 그대로를 읊으면

"옆에 있으면 더 안돼.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멀리 떨어져 있어."

이런 말로, 말 한마디로 무담보 천 냥 대출을 하는 간 큰 남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양파 하나를 반으로 갈라 잘린 단면을 위로 향하게 하고 둥근 부분을 도마 위에 놓고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듯 써는 남자.

겉면이 매끈한 파프리카를 쉽게 썰리는 안쪽은 무시하고 둥그런 바깥쪽을 위태롭게 칼질을 하는 남자.

파프리카의 속을 차마 세상에 보여줄 수 없는 수줍음 많은 남자.

"생각을 해 봐. 표면이 딱딱하고 매끄러운데 그 부분을 자르려고 하면 잘 잘릴까? 속이 보이게 안 쪽을 위로 향하게 해야 잘 잘리고 안전하지. 잘못하면 그러다 손 베어."

라면서 일종의 꿀팁을 대방출하는 이 앞에서

"진짜 잔소리 많네. 진작 알려줬어야지, 그럼!"

이런 말로 대꾸하는 남자.

"그 얘기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겉면은 미끄러워서 칼질하기가 힘들잖아. 한 번만 해도 알잖아."

고 입 아프게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는 대범한 남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손바닥만 한 도마 위에 야채 껍질이며 씨며 속살까지 다 올려놓고 칼질하는 남자.

"인간적으로 버릴 건 좀 버리고 하지. 공간도 얼마 없는데 바로바로 버리면 좀 좋아?"

이 한마디에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냅둬."

라면서 발끈하는 남자.

"몰라도 그렇게 모를까. 알려줘도 듣기 싫어하고, 말해줘도 건성으로 들으니 몸이 고생이지. 왜 일을 만들어서 해?"

라고 말하면

"하여튼 좋은 말 한마디도 안 해. 잘한다 잘한다 해야 더 하고 싶지. 칭찬하는 법이 없다니까."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반응하는 남자.

"잘해야 잘한다고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잘한다고 해?"

양심상 도저히 거짓말이 안 나오는 이 앞에서

"자꾸 그렇게 하면 하고 싶겠어?"

라면서 느닷없이 또 발끈하는 남자.

"생색은 내고 싶고, 솔직히 하기는 싫지?"

라는 (지극히 질문자 입장에서만) 정곡을 찌른 듯한 질문에

"누가 생색내고 싶다고 했어?"

라고 말은 하지만 누구 눈에는 그 속이 빤히 보이는 그 남자.

뭔가 본인이 아쉬울 때나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부엌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그 남자.

솔직히, 인간적으로 그렇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 그 남자.

그냥 차라리 안 나섰으면 더 좋겠는 그 남자.

오히려 일거리를 더 만들어 내는 그 남자.

일자리가 없어 취업할 데가 없다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유일하게 없는 일거리도 만들어 주는 진정한 능력자.

그래도 백만 번에 한 번쯤은 시키는 대로 해서.

"잘했어. 잘하고 있어"

라는 억지 칭찬이라도 기어코 듣고야 마는 그 남자.


남자 중에 남자,

대단한 남자,

하필 우리 집에 있는 그 남자.

그래도 노력이(아마도 노력만) 가상한 그 남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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