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un 20. 2024

선생님은 이름을 꼭 쓰라고 하셨지

스티커로는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누나 가방 가져가야겠다. 그거라도 가져 가, 응?"

"할 수 없지 뭐."

"스티커라도 붙일래?"

"아니, 선생님이 자기 이름 써서 오라고 하셨어."

"그럼 누나 이름 지우고 네 이름 쓰면 되겠다."


극적으로 우리는(아니 또 어쩌면 내 생각에만) 극적으로 합의를 봤다.(고 나는 당연히 생각했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어린이, 엄마 말은 잘 안 듣는 어린이, 오로지 선생님의 지시만 곧이곧대로 따르는 어린이, 그 어린이는 이제 생존수영을 하러 갈 수 있다.

누나 수영 가방을 제 가방으로 둔갑시킨 채.


"합격아, 네 가방 좀 빌려 줄래?"

작년에 남매가 수영을 배우기 위해 같은 수영장에 다닌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생존수영으로는 뭔가 많이 부족함을 느꼈고(물론 나 어릴 때는 그런 것도 없었으니 그나마 감지덕지해야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물에 빠지면 헤엄이라도 쳐서 나올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큰맘 먹고 1대 1 수업으로 몇 달간 다녔던 거다.

"그래. 어차피 난 이제 필요도 없어."

딸은 수영장에 다니기 싫다고 했지만 억지로라도 그런 건 배워야 한다며, 오죽하면 학교에서도 의무적으로 하겠냐며 싫다는 딸을 한사코 아들과 함께 보내 버렸다. 그러나 애초에 흥미가 없었던 딸은 끌려가듯 다녔으므로 다시는 수영장을 다니지 않겠다며, 제 수영 가방은 다시 쓸 일 없다며, 차라리 치워버리라고까지 말했었다.

그 가방이 오늘날 나의 구세주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물론 내가 어디에 둔 것인지 기억조차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아들의 수영 가방으로 거듭날 터였다.

"그런데, 엄마, 누나 이름이 있는데 어떻게 하지? 안 지워지는데. 크게도 썼놨네. 그리고 이름을 두 군데나 썼어."

딸은 싫다 싫다 하면서도 수영 가방에만 애착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실수로라도 제 동생의 것과 뒤바뀌는 날에는 기어코 제 것을 돌려받고야 말았다.

게다가 가방을 꾸미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어졌고, 오히려 천덕꾸러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 내 이름은 어디에다 써?"

"그냥 누나 이름 위에 스티커 붙이고  이름 쓰면 안 돼?"

"안돼. 선생님이 이름 써 오라고 하셨단 말이야."

찰나, 나는 선생님이 '플랜 B'도 좀 마련해 주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만약에 본인의 수영 가방이 없다면 다른 형제자매의 가방을 가져와도 무관합니다. 기존에 있는 이름 위에 스티커를 붙여도 괜찮아요. 자신이 가져온 것을 알 수만 있게 한다면 그 어떤 방법도 상관없습니다."

라고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시기를 나는 바랐던 걸까?

아들에게 선생님은 전부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시면 저렇게 한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만)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어린이, 그 어린이가 바로 내 아들이다.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니 이미 있는 누나 이름이 상당히 거슬린 모양이다.

굳이 자신의 이름을 안 쓰더라도 누나 이름이 있는 채로 가져가도 (물론 내 생각에만)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아들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다행히 제 누나와 같은 이름의 친구가 올해는 같은 반도 아니니까 헷갈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지?

"엄마. 방법이 없을까? 누나 이름이 두 군데나 있는데 지워지지도 않고."

"생각을 해 봐. 어쨌거나 네 이름만 쓰면 되는 거니까 그 부분만 그냥 까맣게 칠해 버리는 건 어때?"

그 단순한 걸 왜 모르는 거라니?

그냥 네 이름만 가방 아무 데나 쓰면 되는 거잖아.

가방 입고 수영할 거야?

가방은 가방일 뿐이잖아.

가방은 놔두고 수영복에 어디 구멍이나 안났는지 그런 걸 더 신경써야 하는 거 아니야?

가방이 그렇게 중요해?

입고 수영도 못하는 거, 그게?

"좋은 생각이 났어."

아들이 갑자기 네임펜을 가져오더니 현란한 손놀림으로 작업에 돌입하셨다.

"난 별을 그릴 거야. 그래서 다 칠해 버릴 거야."

과연 아들은 왕별을 하나 만들어 내셨다.

"그냥 누나 이름 크기에 맞게 까맣게 칠해 버리면 간단할 것을 굳이 별까지 그려야겠어? 왜 일을 더 크게 만들어? 그냥 네 이름만 쓰면 되는 거잖아. 쉽게 하자, 쉽게. 넌 가끔 일을 만들어서 하는 재주가 다 있더라."

라고는 지은 죄가 많은 죄인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물론.

"우와, 우리 아들은 별도 잘 그린다. 정말 멋지네. 친구들도 그 수영장에 다녀서 너랑 똑같은 가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수영 가방은 하나밖에 없을 거야. 별이 있으니까 눈에도 얼른 띄어서 금방 찾을 수 있겠다. 어쩜 우리 아들은 그런 생각을 다 했어?"

라고 호들갑을 최대한 떨어주는 수밖에.

"내꺼라고 써야지. 그래야 내껀 줄 알지. 어때, 엄마?"

어떻긴?

안 봐도 좋다.

보기도 전에 훌륭하다.

솔직히, 그 왕별은 너무 컸다.

엄마의 호응에 다소 기분이 풀린 아들은 그 가방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요리보고 조리보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급히 다시 네임펜을 찾았다.

"참, 내 이름을 안 썼네. 이름을 써야지. 내꺼라고만 하면 누구 가방인지 모르잖아?"


애증의 생존 수영, 그 또한 다 지나가긴 지나갔다.

그리고 나도 아들의 폭풍 잔소리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휴~

매거진의 이전글 누워있으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