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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n 26. 2024

75일 된 거 축하해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요.

2024. 6. 1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우리 아들이 벌써 75일 됐네. 축하해 줘야지."


엊그제 시작한 거 같은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고, 흔해 빠진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다만 두 달 넘게 아들이 꾸준히 (열심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일에 격려 차원에서 내가 출동했다.

'축하 보내기'를 꾸욱 눌렀다.


"엄마, 나 요즘 200 xp 하고 있어."

아들은 한창 'xp'에 집착했다.(고 나는 느꼈다.)

"그렇게나 많이?"

xp가 정확히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200씩이나 하고 있다니까, 아무튼 많긴 많은가 보다 한다.

"나 이제 날마다 그 정도 할 거야."

아들은 결연한 의지를 다 보였다.

"그래. 우리 아들이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덩달아 나도 학구열을 불태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집 멤버들은 매일 영어 사이트에서 공부(그런 것도 공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를 하고 있다.

딸은 벌써 1,000일이 넘었고, 나도 곧 900일이 다 되어 간다.

중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아들의 학습 일수가 다 날아가 버린 적이 있다.

그때의 아들의 좌절하는 눈빛이란.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는 바람에 보는 내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차마 못 봐줄 지경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히 그 양반이 업무로 심히 바쁜 관계로 몇 달째 아예 자신의 몫에 대해 손을 놓아버려서 나는 묘안을 내놓았다.

"그럼 아빠 하는 거 이어받아서 우리 아들이 하면 되겠다. 어차피 아빠는 안 하니까('어차피 안 하니까'에 유난히 더 힘주어 말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그 양반을 똑바로 보면서) 지금 연속학습 일수도 멈춰 있잖아. 어때?"

아들도 솔깃해하는 눈치였다.

"그럼 아빠는?"

그래도 아빠의 대를 쉽게 잇기가 망설여지나 보다.

"괜찮아. 어차피 아빠는 바빠서 하기 힘들대. 아빠 아이디로 이어서 하면 그동안 아빠가 해 놓은 게 있으니까 1일부터 시작 안 해도 되잖아. 괜찮지?"

그러나, 느닷없이 그 양반이 나의 특급 처방(?)이 있은 후로 본인의 학습량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하라고 할 때는 안 하더니 꼭 그럴 때만 나선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그냥 넘겨. 어차피 거의 안 하다시피 하잖아. 그래도 애들이랑 나는 매일 빠짐없이 하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평일은 물론이고 일요일이든 명절이든 크리스마스든 매일 하는 중이다.

최소한의 하루 학습량은 5분에서 10분 정도면 충분했고 기분 내키면 10분이고 한 시간이고 더 할 수도 있었다.

갑자기 꼬부랑 말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날이면 기분에 따라 한참을 붙들고 있게 된다.

"그래. 그럼 되겠네. 아빠 걸로 네가 해라."

딸이 옆에서 부추기자 아들은 마음이 동한 것 같았다.(고 나머지 세 멤버는 확실히 느꼈다.)

그러나, 한 번 가입하기는 쉬워도 뭔가를 변경하려면 꽤나 복잡한 사이트는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래서 우리나라에 대를 잇는 무언가에 약한가 보다.

어쩌면 우리는 회원가입을 하고 일 년 단위로 결제를 하긴 했지만, 이제 그만 다른 사이트를 알아볼까 하다가도 해지하는 방법을 몰라 지금껏 이어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다른 이들도 해지하기가 너무 번거롭고 까다롭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어쨌거나 이왕 해지도 안된 거 각자 최대한 활용을 하면서 '이용을 하자.'라고 대동단결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본전 뽑는다'라고 한다지 아마?

아무렴, 본전은 뽑으라고 있는 거지, 심으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아빠의 대를 이어가리라 장래가 촉망되었던 어린이는 결국 '오늘부터 1일' 이런 식으로 다시 새 출발을 해야만 했다. 2년도 넘게 쌓아 온 '연속학습 일수'를 그야말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했다. (아들도 나와 비슷하게 해 나갔으니 그 사고만 없었다면 내일모레 900일이 될  텐데.)

그리고 두어 달 전에 모든 걸 다시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와는 연속학습 일수가 10배도 더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추스른 후, 이에 굴하지 않고 아들은 전과는 달리(완전 딴판으로 새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처럼) 매우 의욕적으로 학습에 임했다.(고 나만 또 혼자 착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어? 엄마가 나 축하해 줬네?"

가끔 서로 연속학습 일수를 채워가면 '축하하기' 이런 게 있는데 그게 뜨면 일단 나는 누르고 본다.

솔직히 난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고 집착하지도 않지만 딸과 아들은 달랐다.

아마 어려서 그렇겠지.

"엄마, 나는 엄마 축하해 줬는데 왜 난 축하 안 해줘?"

라든지

"엄마한테 뭐 안 떴어?"

라는 말로 반강제적으로 '축하하기' 버튼을 누르게 만드신다.

"엄마, 이번엔 나랑 퀘스트 하자."

남매는 종종 저런 말도 잘하신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퀘스트란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내 학습량을 그날그날 해 나갈 뿐이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서로 짝을 지어 얼마나 꾸준히 잘해 나가는지,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고 은근히 경쟁도 하는 그런  비슷한 것인 것 같다.

만에 하나

"근데 얘들아, 퀘스트가 뭐야?"

라고 남매에게 물었다간

"어휴, 엄마. 그게 뭔지 몰라?"

라면서 내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훈화말씀을 하실 게 분명하다.

그럴 땐 그냥 아는 척, 조신하게 있는 게 상책이다.

간간히 어떤 축하나 제때 보내 주면서 말이다.


"우리 아들이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200 xp면 어느 정도야? 많이 하는 것 같던데."

한 번쯤은 그 실체를 알고 싶어 아들에게 물었다.

"레슨 한 5개 정도 하면 돼."

그렇게 말하는 아들의 얼굴엔 자랑스러움 내지는 뿌듯함이 한껏 깃들어 있었다.

"그래? 그럼 엄마는 몇 xp정도 하는 거지?"

나의 실체도 파악할 겸 소심하게 남매에게 물었다.

"엄마는 달랑 15 xp!"

딸이 틈을 주지 않고 잽싸게 끼어들었다.

나름 한다고 하는데 겨우 15였구나.

그러고 보면 아들은 200이니까 정말 대단한 학습량이다.

200이 누군가의 한 달 월급이라고 해도 내겐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물론 매일 거의 그 정도씩 하는 만큼 온전히 다 습득하고 이해까지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네가 엄마보다 낫다 얘!

그나저나 저  'xp'는 대관절 또 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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