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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l 01. 2024

그대 두려운가요? 한 달 후가?

도둑의 '조삼모사'

2024. 6. 27.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일이 벌써 7월이네."

시간은 항상 빨리 갔다, 내 느낌상.

이제 해가 바뀌었네 싶으면 벌써 서 너 달이 훌쩍 지나버린 후다, 내 기분상.

몇 번 안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반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뜨악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던 나는 우연히 달력을 보다가 '벌써'라는 흔하디 흔한 아쉬움의 말을 했다.

"어? 그러네, 정말. 그럼 여름방학이네."

철없는 어린것들이 환호했다.

물론 나는 절망했다.(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말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런 기분이었다.)


"너희 개학한 지 며칠 안 됐는데(전국의 모든 선생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벌써 또 방학이야?(선생님들도 방학을 기다리시겠지?)"

솔직하다 못해 너무 노골적이었던 내게 우리 집 최연소자가 말했다.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우리가 방학하는 게 싫다는 거야?"

나이는 우리 집 멤버들 중에 가장 어리지만 눈치하나는 우리 집 성인 남성 멤버보다 100배는 빠른 것 같다.(물론 나는 그 멤버가 누구인지는 그 멤버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절대 밝힐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바이다.)

"엄마가 언제 싫다고 했어? 엄마는 그런 말 안 했어. 왜 너 혼자 넘겨짚고 그래? 엄마는 단지 엊그제 개학한 것 같은데 어느새 여름방학을 할 때가 다가왔다는 그 말만 했을 뿐이야. 오해는 하지 마."

원래, 불리할 때는 말이 길어지는 법이다.

한 마디만 해도 될 것을 이 소리 저 소리 아무 소리나 다 하면서 발끈하게 된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고 한다지 아마?

엄마라는 신분의 그 도둑은 유난히 그날 아드님의 발언에 발이 무지하게도 저렸다.

불리할 때는 얼른 화제전환 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 이번 여름 방학 때는 뭐 하면서 보낼까? 전에 하려고 했던 거 해 볼까? 합격이 너 그림 그려보고 싶다고 했잖아."

지난겨울방학 무렵이었던가. 딸이 난데없이 방학 때 그림을 그리겠다고 우리 멤버들 앞에 선포했고 그 양반은 딸과 함께 그 계획에 필요한 물품을 골고루 구입하셨다. 그때 나는 당장 그림 전시회라도 열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이가 마음먹은 일은 종종 생각대로는 잘 안되기도 하는 법, 어쩌다 보니 자자손손 가보로 물려줘도 좋을 만큼 그 물건들은 '보관만' 잘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 것인지 보관을 위해 산 것인지 잠시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래, 누나. 그때 그림 그린다고 다 샀잖아."

아드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에이, 엄마. 아직 방학하려면 멀었어."

딸은 저렇게 엄마 속도 모르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괜찮아, 괜찮아.

방학이 있으면 개학이 있어.

방학은 쓰지만 개학은 달아.

고생 끝에 개학 오는 거야.

하루에 한 번씩, 서른 번 정도만 눈 질끈 감으면 돼.

"근데 너희 방학식이 언제지?"

학교에서 나눠준 학사달력을 보고 나는 그만 망연자실했다.

7월 30일쯤에나 방학을 하겠거니 했는데, 실제 방학식 하는 날은 자그마치 일주일이나 앞선 7월 23일이었다.

이건 좀 당황스러운걸.

예상했던 것보다 일주일이 더 빠를 뿐이었는데 어차피 당겨 쓴 만큼 개학이 빨라지는 것일 텐데, 그거 날짜 좀 달라졌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만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이라니!

"어차피 학습일수가 있으니까 빨리 방학하면 그만큼 빨리 개학하겠지."

현직 초등교사인 친구의 말에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세상 가장 어리석은 엄마 같으니라고.

나는 불현듯 생각했다.

그 '조삼모사', 사실은 오백 생 전에, 아마도 원숭이들이 등장하기도 전에 나 같은 엄마 때문에 생겨난 말인지도 모른다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더 어떠하다, 나는)

방학을 일주일 먼저 하면 어떠하리(그래도 방학이 일주일씩이나 빨리 시작한다는 건 정말 매우 어떠하다, 나는)

개학도 그만큼 일찍 다가오리라(역시 시조의 핵심은 종장이야, 그 힘으로 살 수 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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