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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l 14. 2024

네가 아주 호강에 겨웠구나

배가 불러서

2024. 7. 7. 미니 밤호박

친정 텃밭에 애호박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마구 열리고 있었을 때 멀리 떨어진 외딴 밭에서는 그의 사촌인 다른 생명체들이 조용히 여물고 있었다.

당장 애호박도 그때그때 바로 소비도 못하는 마당에 여기저기 심어 놓은 둥근 호박과 단호박과 미니 밤호박, 이런 것들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서도 사방에 넝쿨을 뻗으며 자라고 있었던 거다.

안 보면 잊힌다는 그 말, 사실은 안 보아도 다 크고는 있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안 보면 더 보란 듯이 더 잘 자라는 것이다.

2024. 7. 7. 둥근 호박

애호박도 좋지만 둥근 호박도 주먹만 할 때 따서 요리를 해 먹으면 또 다른 맛이 난다.

심은지 한참이 지나도 꽃만 피고 호박이 열리지 않아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애호박이 풍년이라 호박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지겠다고 방정맞은 생각을 했던 게 화근이었나 싶었다.

이틀 걸러 두세 개씩 따는 애호박은 따는 재미는 좋았지만 곧  처치 곤란한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밭에서 나는 호박은 그리 많지 않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너무 열리지 않으니 조바심마저 났다.

지난번에 밭에 갔을 때 생긴 지 얼마 안 된 저 작은 두 덩이를 보고 어찌나 반갑던지.

신통방통한 것 같으니라고.

2024. 7. 7. 단호박

밭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보니 따 놓고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단호박 한 덩이를 발견했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다.

행여나 해서 둘러보다가 이런 횡재를 하는 것 말이다.

장마라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데 하마터면 밭에서 썩을 뻔했다.

내가 직접 지은 농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으신 건데  호박 한 덩이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2024. 7. 7.

운 좋게 호박이 열렸지만 간혹 생기자마자 저렇게 시들어서 죽어가는 것들도 있다. 올해는 그 양이 꽤 됐다.

걸핏하면 호박이 풍년이다 못해 귀찮아지려고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더니 입으로 지은 과보를 이런 식으로 받는 것인가 싶었다.

2024. 7. 10.

텃밭에 오랜만에 갔더니 이미 한도 초과한 우량아가, 아니 우량 호박도 한 덩이 있었다. 보통은 나머지 두 호박처럼 저만할 때 따 줬어야 했는데 호박 잎사귀에 가려지면 그 속에서 호박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아직은 호박을 더 따 먹어야 하기 때문에 호박 줄기가 상하지 않게 조심하며 이리저리 젖혀서 찾아봐야 한다. 그러자면  넝쿨을 마구 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히 내가 다 땄다고 했는데 다음날 부모님이 또 몇 개를 추가로 더 따시곤 한다. 그것도 아주 크나큰 놈들로 말이다.

"호박 다 따라고 하니까 왜 안 땄냐?"

라는 말은 덤으로 듣고 말이다.

l2024. 7. 7.

이미 단호박은 지난번에 거의 다 수확을 했는데 이건 또 못 봤나 보다. 줄기는 다 시들어 죽어가는데 아직 무사하다. 어차피 단호박은 따고 난 후에 후숙 해서 먹는 거라 며칠 더 대롱거리게 밭에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아 따지는 않았다. 다음에 갈 때까지 무사히 있을지는 모르겠다.

2024. 7. 7.

이미 단단히 여문 단호박은 거의 다 수확했는데 이제야 달린 어린 단호박도 몇 개 보였다.

저만할 때 따서 카레를 만들 때 넣어도 좋고 된장국으로 끓여 먹어도 제법 맛이 좋다.

한 오백 년 전에 직장생활을 할 때도 올해처럼 단호박이 풍년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 직원들에게 나눠 줬더니 저런 영업 비밀을 대방출해주셨다.

이미 줄기가 많이 시들어서 까맣게 다 익을 까지 안 죽고 살아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것들'에는 손대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나 사방 천지에 호박이 풍년(일단 수가 많으면 나는 풍년이라고 생각한다)인 요즘, 마트에 가도 호박은 거들떠도 안 보게 된다.

시시하다, 호박.

살 일도 살 필요도 없다, 물론.

친정에서도 질리게 보고 또 본 파란 덩이들, 사고 싶지도 않다.

사기는커녕 다 따서 내다 팔고 싶을 지경이다.

물론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나눠 먹을 것은 있어도 팔 것은 없다!"

놀랍게도 볶아 먹고 지져 먹고 튀겨 먹어도, 그래도 남는다.

나눠 먹어도 남는다.

질린다, 진심으로.

맛도 없다, 이제는.

안다, 지금 호강에 겨워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또 깨달았다.

촌수저로 산다는 것은 가끔은 나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자연의 섭리대로 거두어들이는 대로 한 가지 재료만으로 한 계절을 질리게 나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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