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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ug 02. 2024

어쭈구리! 너구리야?!

세상은 넓고 라이벌은 넘쳐난다

2024. 7. 29.

<사진 임자 = 글임자 >


"얼른 먹어. 너구리가 다 먹기 전에."

"무슨 소리야?"

"너구리가 우리 수박 다 먹는다고."

"너구리가 그런 걸 먹어?"

"응. 요즘 수박밭에 와서 걸핏하면 먹고 간대."



그놈들,

나쁜 놈들,

양심도 없는 놈들,

염치라고는 1도 없는 놈들,

아마도 나의 강력한 숙명의 라이벌,

사람도 아닌 것이 귀신도 아닌 것이, 사람보다 더 잽싸고 귀신도 곡할 만큼 치밀하시다.

그래, 이것은 쫄깃쫄깃, 오동통통 그 너구리가 아니여!

그 너구리는 끓여 먹는 너구리고, 이 너구리는 끓여 먹지도 못하는 너구리다.

그것도 나와 라이벌 대결을 펼치고 있는 너구리 말이다.


"또 그놈들이 다 갉아먹었더라. 얼른 갖다 먹어라. 수박 안 남아나게 생겼다."

"그놈들이 수박도 먹어?"

"나도 아직 맛 안봤구만 그놈들이 먼저 다 입 댔더라."

하루는 엄마가 다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너구리'란 녀석이 수박밭에 요즘 자주 출몰하신다고 한다.

동네 분들 증언에 따르면 여기저기 밭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신다고.

너구리가 수박을 먹는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초범도 아니다.

상습범이다.

게다가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물론 다 먹어 치워 버린다면 그 죄는 더 무거워지겠지만,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이쪽에서 입만 댔다가 갉아먹고 저쪽에서 또 같은 짓을 반복해서 결국엔 사람도 못 먹게 만들어 놓는다고 엄마는 내게 제보하셨다.

너구리가 그럴 줄은 몰랐지.

아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멧돼지가 밭을 다 헤집으며 옥수수며 고구마를 마구 먹어 치운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직접 목격한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너구리는 정말 의외였다.

"엄마, 그럼 어떡해? 그놈들이 다 먹으면 우리가 먹을 게 없잖아.(=내가 많이 가져가서 다 먹어야 하는데 너구리한테 주기는 싫어)"

"큰일이다. 사람 먹을 것도 없이 그놈들이 다 입 대 놔서."

"그럼 그런 건 어떻게 해? 어차피 못 먹잖아. 닭이라도 갖다 줘야겠네."

"안 그래도 다 갖다가 닭 줬다. 닭만 좋은 일 났다."

"그래. 닭이라도 먹으니까 다행이네. 버리긴 아까운데."

나는 못 먹더라도 닭이라도 수박 맛을 봤으니까 그냥 버리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 수박 한 통을 길러 내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난데없는 너구리의 습격에 어이없이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다니 분하다.


어떻게든 빨리 수박을 먹어 치우고 또 조달해 와야 했다.

너구리가 그 범행 현장을 다시 찾기 전에.

그 양반이 예뻐서라기보다, 너구리에게만은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너구리 차지가 되느니 사람이 먹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너구리 덕분에(?) 그 양반이 연일 수박 포식을 하는 중이시다.

우리 부모님이 너구리 먹으라고 그렇게 고생해서 수박을 키운 건 결코 아닌데, 어쩜 너구리 네가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그럴 수도 있는 것이려니 하다가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을 만나면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너구리 네가 더 수박을 많이 먹나 내가 더 많이 먹나 대결해 보자.

유치하게 이 나이에 내가 너구리랑 이러고 있어야 하다니.

어쨌너구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아.

촌수저로 산다는 건 종종 이렇듯 엉뚱한 동물들과 어떤 대결도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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