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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ug 24. 2024

엄마는 왜 들기름병을 '아빠 몰래' 숨겨야만 했나

엄마의 속사정

2024. 8. 23.


<사진 임자  = 글임자 >


"너 먼저 가라."

방앗간에서 고춧가루와 들기름, 참기름을 다 챙겨서 친정집에 도착했는데 엄마는 차에서 안 내리셨다.

"엄마, 갑시다."

날도 더운데 혼자 뭐 하려고 그러시나 싶어 나는 엄마를 재촉했다.

"나는 좀 있다가 갈란다. 먼저 가."

엄마는 자꾸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하셨다.

"왜? 더운데 여기서 뭐 하시게?"

정말 엄마는 이상한 고집을 부리셨다.

엄마 집인데 왜 안 들어가려고 그러시는 거람?


"집에 아빠 계실 것이다. 난 더 있다가 갈란다."

"아빠가 있으면 어때서?"

"아빠가 이거 보믄 안 된단 말이다."

"뭘???"

"아빠 오시기 전에 모르게 들고 갈라고 했더니만 오늘은 어째 빨리도 들어오셨다, 성가시게."

"뭘 아빠 모르게 가져간다고?"

갑자기 칠순도 넘은 엄마가 마흔도 넘은 딸과 대낮에 스무고개를 하자는 건가?

엄마는 도대체 뭘 그렇게 감추고 싶으신 거지?

그것도 아빠만 모르게?


엄마에게도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아빠는 들깨기름 한 번에 다 짜지 말고 조금씩만 짜서 먹으라고 한디 나는 성가셔서 그렇게 못하겄더라. 바쁜디 언제 한가하게 기름만 짜러 다니겄냐. 하여튼 나는 느이 아빠랑은 안 맞다 안 맞아. 들기름을 이라고 한 병(1.5리터)이나  짠 거 알믄 아빠 난리 날 것이다. 어디다 안 보이게 숨겨갖고 가야 쓰겄는디 뭣으로 싸서 가져가야 쓰겄냐?"

"그냥 가져가면 되지. 아빠가 이거 다 검사할 것도 아닌데."

"아니다. 내가 '참기름만 짜 온다'고 거짓말 했는디 기름병이 두 개나 되믄 이것이 뭣이냐고 틀림없이 보자고 할 것이다."

"이왕 짜 버린 거 어쩌겠수? 그냥 다 들고 갑시다."

"아니다, 아니여. 아빠 알믄 안 된다. 얼른 먼저 가라."

"별 걸 다 걱정하네. 아빠는 관심도 없을 텐데."

"아빠가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본단 말이다.(우리 집 누구랑 똑같네?) 한 번에 이렇게 들기름 많이 짰다고 분명히 잔소리할 것이다. 그 잔소리 듣기도 싫다. 얼른 먼저 가라."

그러니까, 아빠의 '잔소리'라는 대목에서 나는 단번에 엄마 마음을 이해함과 동시에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불길한 앞일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엄마에게 적극 협조하기에 이르렀다.

특히나 '아빠 잔소리는 듣기도 싫다'면서 진심을 다해 힘주어 말하는 엄마의 태도에 나는 먼저 친정 집으로 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아빠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절대.

아빠는 분명히 잔소리가 없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확실히.


엄마는 늘 말씀하신다.

아빠는 잔소리가 '심하다'고.

그냥 단순히 잔소리가 많은 게 아니라 심하다고 말이다.

물론 나도 종종 그렇게 느끼는 터라 딱히 엄마의 고집에 더 이상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건강상식' 내지는 '건강 너튜버' 그리고 일부 '전문가' 때문이다.

"들기름은 참기름보다 산패가 더 빨리 된다고 그러더라. 인자 앞으로는 그때그때 조금씩만 짜 먹어야 쓰겄다."

언젠가 아빠는 엄마와 내 앞에서 선포하셨다.

아빠는 당신의 의지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엄마에게 대놓고 '그때그때' 바로바로 어떤 일 처리를 원하셨던 거다.

그리고 동시에 한 단계 더 강력한 요구를 하셨다.

"들기름은 개봉한 지 한 달 안에 먹어야 된다고 하더라."

그 이후로 엄마는 시달리고 계신다.

하필 왜 아빠는 그때 그 영상을 보셔가지고는...

이제 엄마는 (성가시고 귀찮고 번거롭고 거추장스럽고 짜증스럽기까지 하게도) '들기름은 소량만 짜서 개봉을 한 후에는 한 달 안에 반드시 소비해야 한다.'는 아빠의 단호한 주문에 꼼짝없이 발 묶이게 되어 버렸다.

30년 가까이 아빠와 같이 산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만에 하나 저리 하지 않았다가는 아빠는 엄마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 말인즉,

"왜 조금씩 짜라고 하니까 한꺼번에 많이 짰냐?"

라든가

"들기름은 산패가 빨리 되니까 얼른 한 달이되기 전에 먹어야 된다."

라는 식의 말씀을 계속 듣게 될 것이라는 거다, 오롯이 엄마 혼자서 말이다.

엄마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저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잔소리한다'라고 한다지 아마?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간섭 좀 하지 마쇼!"

라고 엄마도 두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저렇게 세게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지를 굽힐 아빠도 아니었다.

"다 건강 생각해서 그러는 거제. 몸에 좋으라고. 내 말만 들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아무 해가 없어."

라고 말씀하시며 엄마에게 '너튜브' 관련 영상을 보여 주신다.(하지만 엄마는 그런 영상 같은 건 역병 보듯 멀리 하며 거들떠도 안 보신다, 물론.)

과연 아빠가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말은 곧 좀 전에 들었던 아빠의 말씀이었다.

"하이고, 방앗간에 한 번도 안 감서 뭐라고 저렇게 잔소리는 할꺼나? 기름이나 한 번 짜 오고 그런 소리 하쇼. 날마다 집에서만 이래라저래라, 그만 좀 하쇼."

아닌 게 아니라 엄마 말 그른 것 하나 없었다.

언제나 방앗간 방문은 엄마 몫이었다.

단지 아빠는 주문할 뿐이다.

그리고 간혹 원하는 대로 해 오지 않으면 네버 엔딩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단언컨대 부부 불화의 모든 원인 제공은 '너튜브'라고.

우리가 언제부터 들기름의 산패에 대해 운운했던고?

아는 것이 병, 모르는 게 약일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다.

옛날에는 그냥 시간 나는 대로 양껏 들깨를 방앗간에 가져가서 몇 병이고 그 고소한 것을 짠 다음 몇 날 며칠, 몇 달 간도 쟁여 두고 먹곤 했는데.

(물론 그 시절의 그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산패에는 살짝 예민한 사람이니까.)

단지, 적당히,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아빠 말씀도 틀리지 않지만 나는 그만 엄마가 딱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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