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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ug 31. 2024

이 정도면 천생연분이죠

들기름 앞에서 일심동체

2024. 8.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들기름이 왜 이렇게 차가워?"

"냉장고에서 나와서 그러제."

"왜 들기름이 거기서 나와?"

"들기름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먹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결국 부모님은 천생연분이었던 거다.

안 맞다 안 맞다 하시면서, 그러면서도 아빠 말씀대로 다 하셨다, 엄마는.


"참기름은 상온 보관하고 들기름은 냉장고에 두고 먹어야 된다고 하더라."

언젠가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다.

물론 엄마도 앞에 두고 말이다.

엄마도 새겨듣고 나도 새겨들으라는 뜻이었다.

"아이고, 들기름 그거 냉장고에 안 넣어도 아무 이상 없습디다. 또 어디서 뭣을 보고 저러신다냐?"

엄마는, 그때는,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셨다.(고 나는 단호한 엄마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게. 아빠 또 누가 뭐라고 했수?"

나도 이번만큼은 엄마를 물심양면으로(그러나 실제로는 말로만) 적극 도울 의지가 있었다. 평소에 아빠는 너무 고집스럽다 싶을 만큼 (아빠 말씀에 의하면) 여러 분야의 전문가, 교수, 의사 등등 이런 이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엄마에게까지 그들의 말대로 따르기를 강요하시곤 한다. 이번에도 분명히 누가 바람(?)을 넣은 게 틀림없다.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한 거람?

지난번에 들기름은 소량만 짜서 개봉 후 에는 한 달 안에 소비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시더니 이번엔 그 가련한 들기름의 보관 방법과 장소가 아빠의 레이더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쉽게 벗어날 수는 없으리. 결코 벗어날 수는 없으리.

"내가 다 어디서 본 것이 있다. 들기름은 상온 보관하면 안 돼. 참기름 하고 달라. 참기름은 상온에 보관해도 들기름은 냉장 보관해야 되는 것이다."

기름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고소하면 그만 아닌가?

과연 참기름과 들기름, 이 둘은 애초에 상온에서, 직사광선은 피한 채로 서로 의지하며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또 어디서 뭘 보고 그러시냐고? 누가 그랬는데?"

"이거 한 번 봐봐라. 다 그 소리 하더라. 들기름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먹어야 된다고 그랬다니까. 아무튼 그리 알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믄 돼. 내 말 들어서 손해 날 거 하나 없다. 얼른 냉장고에 넣어 놔라."

여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상온에 방치된 들기름을 보며 아빠는 재촉하셨다. 확신하건대 그 대상은 나와 엄마 두 사람 모두에게.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냥 놔두고 먹읍시다. 기름을 냉장고에 넣으란 말은 처음 들어 보네."

평소 상식으로라면 기름을 냉장고에 보관하는 일은, 솔직히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세상만사 별의별 일을 다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니까. 얼른 냉장고에 갖다 놔."

아빠는 더욱 강하게 말씀하셨다.

"하여튼 너희 아빠는 어디서 이상한 것만 봐가지고 나를 성가시게 다. 이래서 내가 아빠랑 안 맞다고 하제. 뭔 들기름을 냉장고에다 넣으라고 그런가 모르겄다."

잠자코 계시던 엄마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소연을 하셨다.

들기름의 거취 때문에 또 분란이 일게 생겼다.

들기름이 냉장고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렇다면 왜 그동안 그 영업비밀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거지? 그걸 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거지? 너도 나도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정말 도대체 아빠는 (나는 아직 들어 본 적도 없는) 저런 정보들은 다 어디서 얻는 거람?

틀림없이 그 요망한 '너튜브'가 단단히 한몫했을 거다.

아빠는, 그러니까 요즘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유치원이 아니라 '너튜브'에서 배우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진심으로)

아빠는 나름 근거 있는 이유(남들이 하는 말)를 들어 엄마에게 어떤 요구를 하시고 엄마는 그런 건 세상 쓰잘데기 없는 거라고 흘려듣기 일쑤였다. 그래서 가끔은 마찰을 빚을 때도 있긴 하다.

이번엔 들기름이 당첨된 것이다.

"이리 와서 봐라. 내가 없는 소리한가 한번 봐봐."

어느새 아빠는 '너튜브'의 한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하셨다. 다짜고짜 엄마와 내게 얼른 와서 보라고 명령까지 하셨다.

나는 그나마 살짝 흘낏 보는 시늉은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엄마는 시큰둥하셨다, 물론.

과연 친정집 들기름은 냉장고로 들어갈 수 있을까.

쓸데없이 딸만 부모님이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친정에 갔을 때 고춧잎을 무치던 엄마가 냉장고에서 당당히 꺼낸 들기름병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엄마, 결국 들기름 냉장고에 넣었어?"

그렇게 아빠 의견에 결사반대 하시더니 그것을 냉장고에 고이 모셔 두셨군그래.

"너는 아직도 모르냐? 들기름은 냉장고에 넣고 먹어야 된단다. 너 냉장고에 안 넣어 놨지? 보나 마나 안넣었겄제? 오늘 가서 얼른 냉장고에 넣어라. 그것은 참기름 하고 달라서 밖에 놔두믄 안 된단다. 잊어먹지 말고 냉장고에 넣어라. 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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