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그 병은 불치병임에 틀림없으리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할 수 있는 그러한 병이다.
아들이 용돈으로 어떤 물건을 구입했다.
정확히는 아들이 입을 뻥긋하자 그 양반이 잽싸게 주문을 해서 사게 된 것이다.
토끼도 아닌데 당근을 어찌나 사랑하시는지.
물건을 구입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우리 집에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특히나 그 양반이 중간에 끼게 됐을 경우에는 반드시 말이다.
"우리 아들, 아빠가 다 해 놨으니까 나중에 편의점 가서 찾기만 하면 돼. 그건 네가 찾아올 수 있겠지?"
다짜고짜 아들보고,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편의점에 직접 가서 (그것도 반드시 혼자 몸으로) 택배를 수령하라고 상명하달하셨다.
아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혼자?"
"그럼. 이젠 4학년이니까 혼자 가야지."
"난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아빠가 가르쳐 줄게."
"그냥 아빠가 찾아 주면 안 돼?"
"너 혼자 가서 찾아봐. 너도 이만큼 컸는데 혼자 그 정도는 해야지."
"근데 난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아빠가 가르쳐 준다고."
갑자기 쩔쩔매기 시작하는 아들 앞에서 그 양반은 지도를 보여주고 설명을 하며 한참 동안 훈화말씀을 이어 가셨다.
"금방 올 거야. 여기 도착하면 연락 오니까 그때 아빠가 알려 줄게. 가서 찾아와."
"정말 나 혼자만 가라고?"
"그래. 그 정도도 못하겠어? 아빠가 다 가르쳐 줬잖아?"
아들은 거의 절망적인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내게 구원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가 같이 가 줄 거지?"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양반이 새치기를 했다.
"엄마가 왜 가? 너 혼자 가라니까! 네 물건이잖아. 그것도 못 하겠어? 언제까지 엄마한테 다 해달라고 부탁할 거야?"
이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또 너무 선을 넘는 것 같았다.
"왜 말을 그렇게 해? '그것도 못 하겠어'가 뭐야? 말할 줄 몰라? 말 좀 좋게 해. '이제 너도 혼자 스스로 해 봐.', 그렇게 말하든지 '엄마 아빠 없이도 혼자 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니까 이참에 한 번 해 보는 게 어때?', '처음에만 어렵지 해 보면 별 것도 아니니까 우리 아들은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 좀 하면 안 돼?! 무조건 너 혼자 다 해라 이러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라고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이니까 나랑 같이 갈 수도 있는 거지. 무조건 애 혼자 가라고 하면 어떡해? 지도 그거 좀 보고 설명 조금 듣는다고 한 번에 거길 바로 찾아가겠어? 처음엔 같이 가 줄 수도 있는 거지. 태어나서 한 번도 안 가본 데를 무작정 혼자 가라고 해? 그럼 최소한 먼저 가라고 하고 뒤에서 따라가 보기라도 해 줘야지."
그 양반은 내가 같이 해 주면 무조건 '약하게 키운다'고 단정 짓는 사람이다.
학교나 왔다 갔다 하고 집 앞 태권도 학원 다니고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인 4학년 짜리를, 가뜩이나 처음 해 보는 일에 겁을 먹는 아들을(아들이 그런 성격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조건 혼자 다 알아서 하란 식으로 내몰면 어쩌자는 건가.
나도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키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양반 눈에는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다는 것이다.
"이제 다 컸으니까 혼자 해 봐야지,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야?"
내가 언제 평생 따라다닌다고 했나?
처음이니까 동행해 줄 수는 있는 일이다 이거지.
내가 혼자 가서 북 치고 장구치고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자신 없어하니 처음에만 같이 동행해 주겠다 이건데 말이다.
"그렇게 옆에서 다 해 주면 애들이 너무 약해진다니까. 애들을 강하게 키워야지."
이럴 때 보면 정말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다.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을 엄마가 조금 도와주는데 뭘 그리 약하게 키운다는 걸까?
세상이 하도 흉흉하고 가는 길에 차도 너무 많이 다니는 데다가 아직은 혼자 낯선 곳에 내보내는 게 걱정스러워서 그런 것뿐이지 내가 무조건 싸고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당신이 그러니까 문제야. 애들이 혼자 할 수 있게 해야지. 다 해주면 어떻게 해?"
도대체 내가 뭘 다 해줬다는 거지?
최소한 나는 아이들 스스로 해야 할 일과 내가 도움을 주어야 할 일 정도는 구분해서 하고 있는데 말이다.(물론 이것도 그 양반 눈으로는 마땅치 않을 것이다.)
"아빠, 나보고 찾아오라고 할 거였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그렇게 할 줄 알았으면 거기서 안 샀지."
아들이 마침내 진심을 고백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아들은 정말 이 상황이 부담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양반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런 것도 못 해? 평생 이렇게 살 거야? 편하게만 살면 좋을 것 같아? 계속 엄마한테 다 해 달라고 할래?"
또, 말을 저렇게밖에 못 하다니!
다시 또 내가 나설 차례인가?
하지만 급하게 아들은 작전변경을 했다.
"누나, 누나가 나랑 같이 가 주면 안 돼?"
아들이 제 누나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그럴까?"
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딸이 수락만 한다면야 나는 깔끔하게 빠질 생각이었다. 그래도 딸과 같이 보내면 그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