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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ug 28. 2024

어머님은 왜 술병 가지고 그러시는 거야?

이런 중생 구제 불가

2024. 8. 27.


< 사진 임자 = 글임자 >


"진짜 어머님은 이상해."

"또 뭐가?"

"저게 뭐야?"

"저게 왜?"

"왜 꼭 술병에다가 참기름을 담아 주시냐고?"

"또 호강에 겨워서 배부른 소리 하시네?"


그 양반이 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다듬어 주려고 하셨다.

잠자코 있기나 해.

그냥 가만히만 있어.

내가 몇 번을 얘기해?!

우리 엄마 하는 일에 나서지 좀 마.

이 인간이 또, 시작이네, 정말.


"애들 교육상도 안 좋잖아. 왜 하필이면 소주병이냐고? 다른 데다 담아 주실 수 없어?"

교육? 지금 교육이라고 했겠다?

참기름 내지는 들기름이 소주병에 들어 있긴 했으나 그건 분명히 고소한 것이지 취하게 만드는 액체가 아니다, 단연코.

왜 하필이면 소주병이냐니?

그럼 맥주병에 담아 주리?

장모님이 사시사철 오만가지 농산물을 공짜로 다 주니까 배부른 소리 하고 계신다.

소주병에 들어 있으면 어떻고 맥주병에 들어 있으면 뭐 어때서?

참기름과 들기름은 그 정체성을 절대 잃지 않는다고.

(물론 처음에 소주병에 담길 때 살짝 그 두 기름들은 정체성의 혼란 비슷한 것을 경험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소주병이 왜? 그게 애들 교육까지 들먹일 일이야?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보기에 안 좋다. 술병이잖아."

"그럼 보지 마. 먹지도 말고. 술병이든 안주병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난 술병에 기름 담는 거 별로 안 좋더라."

안 좋으면 먹지나 말 것이지.

애들 교육상으로도 안 좋다는 그 술병에 담긴 들기름을 최근에 만든 도토리 묵에 내일을 안 살 사람처럼 헤프게 들이부었더니 연신 맛있다고 마구마구 흡입하시던 인간이 누구였더라?

참기름, 들기름이 어느 병에 담기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난 한 번도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름 엄마는 알코올이 들어 있었던 병이니 소독도 더 잘 됐을 거라는 판단하에 (물론 세척도 여러 번 다시 하고 바짝 말린 것으로만 사용하긴 하지만) 녹색의 그 병들을 사랑해 마지않았고, 여태껏 고소한 기름들을 담고 담으셨다.

"어머님, 이게 대체 뭡니까? 왜 하필이면 애들 교육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소주병에 참기름과 들기름을 담으신 거죠?"

라고 항의하는 며느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엄마의 세 며느리들 중에 말이다.

다만 나는 이런 풍경을 목격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고생해서 농사지으신 걸로 저희까지 챙겨 주시고 맛있게 잘 먹을게요."

라고 답례하는 세 며느리들은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엄마의 사위는, 그러나 저 소주병이 상당히 마뜩잖으시단다.

 "그냥 주는 대로 먹기나 해. 잔소리 그만하고."

더 입이 아파지기 전에 나는 더 이상 그 양반의 이해불가한 불평을 듣고 싶지 않았다.

기존의 병의 용도가 무어 그리 중요한 것이란 말이던가.

"아이고, 어머님. 참기름을 이렇게나 많이 챙겨 주시다니요! 어머님 덕분에 맛있는 반찬 많이 먹을 수 있겠네요. 고맙습니다. 역시 어머님이 최고입니다."

라는, 입에 침을 잔뜩 바르고도 못할 그런 소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 양반에게서.

자고로 소주병에 참기름을 한 번도 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그 병에 한 번만 담아 본 사람은 없다.(고 근거도 없이 또 마냥 확신한다.)

얼마나 쓰임새가 안성맞춤이냔 말이다.

친정 아빠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으시는 산패를 고려한 저 소주병의 색상을 보시라!

어쩌면 소주병은 쓰디쓴 그 술을 비운 후에는 애초에 참기름병으로 거듭나기 위해 저 초록 색깔을 입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라고 또 혼자만 얼토당토않은 추측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주병의 이모작 인생,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소주병에게도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

다만,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소주병의 뚜껑이 분실된 관계로 엉뚱한 다른 병의 뚜껑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는 사실은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뚜껑이든 저 뚜껑이든 기름이 새지 않게 잘 막아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행이다, 그 인간이 소주병과 뚜껑이 세트가 아닌 상태로 존재하는 이 모습까지는 목격하지 못하였으니.

참기름 병이 소주병인 것도 못마땅한 마당에 느닷없는 병뚜껑의 출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엄마는 그저 소주병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았을 뿐이다.

나도 어떤 용기의 내용물이 다 비워진 후에는 다른 용도로 종종 사용하기도 했었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참기름 병의 출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따지고 들 줄은 몰랐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그 고소한 참기름, 들기름으로 반찬을 만들어 먹노라면 나는 그 맛에서 우리 부모님의 짜디 짠 땀 냄새가 다 나는데, 일 년 내내 먹을거리를 대 주시는 부모님을 보면 고맙다가도 딸인 나는 안쓰러울 때가 많은데 어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저렇게 야박하게 할까.

인연 없는 중생은 구제하기 어렵다 하시더니, 참말로, 그렇구나.

틀림없구나.

그리고 꼭 내가 구제해야 할 필요도 없겠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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