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기들 금방 오니까 얼른 준비해놔야겄다. 이참에 오믄 다 가져가라고 해야제. 저번에도 준다고 다 챙겨 놓고 정신없어서 못준 것이 많더라."
물론 여기서의 애기들은 엄마의 친손자들을 말한다.
종종 외손자들이 될 때도 있고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가깝게 사니까 한 번이라도 더 아이들과 친정에 가게 되지만(그것도 요즘엔 여의치 않아 함께 가는 날이 점점 뜸해지긴 했지만) 오빠네 아들들과 동생네 아들은 그야말로 손님처럼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하나라도 더 챙겨 주시려고 최소한 1, 2주 전부터 부산을 떠는 것이다.
"근데, 오빠가 오긴 온다고 했수?"
"오지 왜 안 오냐?"
"그거야 모르지. 애들이랑 여행 갈 수도 있고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 오겄지..."
"명절마다 오는데 한 두 번 안 와도 되지 뭐. 그리고 저번에 엄마 가셨잖아. 엊그제 얼굴 봤는데"
"그래도 니 오빠는 올 것이다. 오빠가 안 간다고 하믄 언니가 가자고 할 것이다."
엄마는 며느리를 완전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착각일지도 몰랐다.(고 나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엄마의 바람일 뿐일지도 몰랐다.(고 강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당연히 며느리가 시가에 올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나중에 서운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엄마가 기다리고 계시니까 서운해하실까 봐 꼬박꼬박 아들 며느리가 오는 것인지도.
여름 손님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데, 이젠 한여름도 지났고 남의 자식들도 다들(어쩌면 많이) 부모님을 찾아뵈는 날이니 으레 내 자식들도 오겠거니 하면서 진작부터 엄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신 거다.
"언니 오면 줄라고 기름 짠다. 너도 기름 한 병 갖다 먹어라."
며느리 몫 먼저 챙기고 딸에게 순번이 온다.
나야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생각해 보니 8월 말에 이미 한번 방앗간을 다녀오시고 또 며칠 전에 방앗간을 가셨다.
"우선 먹으라고 이놈 갖다 주고, 나중에 추석에 오믄 또 새로 짜서 줘야겄다."
볼 일이 있어 2주 전에 오빠네 다녀 가실 때 들기름을 이미 세 병 들고 가셨었다.
일단 '우선 먹을 놈'이라는 명목하에 말이다.
저렇게 아들 며느리 생각이 지극하시다.
"언니한테 고사리 갖다 준다고 해놓고 그것을 안 챙겨갔단 말이다. 내가 착실히 봉다리에 다 싸 놓았구만. 아이고, 내가 정신이 이라고 없다. 나중에 너나 갖다 먹어라."
언젠가 오빠네 가실 때 바리바리 싼 보따리 안에 '가져갔어야 마땅한 고사리 봉다리'가 없는 것을 알고 망연자실해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참에 추석 때 언니 오믄 줄라고 녹두 가리고 있다. 너도 나중에 와서 녹두 좀 갖다 먹어라."
이런,
또 엄마의 며느리에게 밀렸다.
하지만 덕분에 나도 얻어먹을 수 있으니 이게 웬 횡재냐.
"하여튼 엄마는 이렇게 며느리 생각만 해."
실없는 소리를 하는 딸에게 엄마는 정곡을 찌르신다.
"너도 시가에서 다 갖다 먹음서 그러냐. 저도 시어매한테 다 갖다 먹음서 그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어머님이 하나뿐인(아직은 시동생이 결혼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시가에서 여전히 하나뿐인 며느리다) 며느리라며 항상 뭐든 다 챙겨 주시는 걸 엄마는 매우 잘 아신다.
"그래. 엄마, 언니 많이 줘."
셋씩이나 되는 아들 키운다고(가끔은 아들이 넷 같다고 말하는 언니다) 고생 많은 큰 새언니를 생각하면 나도 뭐라도 더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워진다.
"그래도 엄마, 혹시 오빠랑 언니가 못 올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언니도 계속 일하니까 쉬고 싶을 텐데."
해가 갈수록 몸이 안 좋아져서 다른 때는 아들이고 손자들이 오는 것도 부담스러워하시면서도 명절만큼은 포기 못하시는 엄마다.
그런 엄마 마음을 알고 언니는 더 명절을 챙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느이 새언니 같은 사람 요새 없다."
"그라제! 요즘 그런 며느리 없제, 진짜."
그날도 엄마의 맏며느리가(다른 두 며느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얼마나 보기 드문 며느리인가에 대한 확신으로 모녀의 대화는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