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도 더 전에, 까마득한 날에 아직도 애호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호박 넝쿨을 다 걷어내고 치워버리겠다고 엄마가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게 너무 아까운 생각에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애호박을 건져볼까 애면글면 했었다.
아직 저렇게 이파리가 싱싱한데 막 생겨 난 콩알만 한 연두색 애호박이 사방에 달려 있는데 '벌써' 그것을 다 치워버리겠다는 얘기에 말이다.
"엄마, 호박이 저렇게 많이 열려 있는데 아깝게 다 버리게?"
할 수만 있다면 그 호박 뿌리를 조심히 캐다가 우리 집으로 가져와 옮겨 심고 싶을 지경이었다.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은 멋있게라도 보이지, 방울방울 넝쿨에 달린 애호박 천지일 때 넝쿨을 걷어 내겠다는 말은 너무 잔인했다.(고 나만 느꼈다)
(잘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가을이 오고 첫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올 때까지도 따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내 욕심이지만 말이다.
몇 년간 눈여겨본 결과 늙은 호박이든 애호박이든 뿌리만 성하게 살아 있으면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도 호박이 열리곤 했으니까, 최대한 호박을 늦게까지 많이 먹고 싶었다. 호박 그거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까지 집착을 보이는지 그런 내 모습에 내가 놀랍기까지 할 정도였다. 가격을 떠나 호박을 심어서 키우고 따 먹는 그 재미가(물론 내가 한 일은 어쩌다 한 번 호박 모종에 물 조금 준 게 다고 따 먹는 일에 더 열심이긴 했지만)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은 새파란 호박잎이며 멀쩡히 달려 있는 호박 알갱이들이 너무 불쌍하단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자라다가 때가 돼서 사그라지는 게 아니라 억지로 목숨을 끊어줘야 하는 상황에 말이다.
하지만 수박도 먹고 싶고 애호박도 먹고 싶은 나와는 달리 이제 부모님은 텃밭을 정리해야 한다고 하셨다. 조금 있다가 또 김장 배추도 심어야 하니 어차피 애호박의 운명은 수박 넝쿨에 자리를 내주면서 동시에 다음에 심어질 작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는 거였다.
겨우 애호박 모종 두세 개를 심었는데 수확량은 엄청났다.
다시금 느닷없는 생각도 해 봤다.
폐백 때 대추만 던지지 말고 애호박도 꽤 괜찮은 것 같다고.
물론 부모님이 농사를 잘 지어서 그렇게 실하게 열렸겠지만 말이다.
애호박 넝쿨 제거 예보가 있은 후 한참만에 친정에 갔을 때 과연 호박 넝쿨이 있던 자리는 아주 휑했다. 텃밭 가장자리에 넝쿨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대신 수박 넝쿨이 더 자유로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그 이후로 수박을 수 십 통도 더 따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친정에 들른 날 나는 여전히 일부 호박 넝쿨이 멀쩡한 것을 목격했다. 그것도 새로이 애호박이 열린 채로 말이다.
"엄마, 호박이 또 열렸네? 넝쿨 걷어 냈어도 안 죽고 살았나 보네."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 신기한 풍경을 본 어린아이마냥 신나서 엄마에게 제보했다.
"그것은 줄기에서 뿌리만 다시 내리믄 또 산단다."
별 일도 아닌 것 가지고 호들갑이라는 표정으로 엄마는 시큰둥해하셨다
"아, 그런 거였어? 호박 많이 열렸던데?"
나는 새로 열린 애호박이 너무 기특하고 반가운 나머지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도 보여줬다.
"너희 몰랐지? 호박 넝쿨이 땅에 닿아 있으면 거기서 다시 뿌리가 내려서 살 수 있대. 호박 열린 것 좀 봐. 외할머니 집에 애호박 또 많이 열렸더라. 호박이 생명력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어."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이들도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관심을 보였다.
"엄마, 그게 말이 돼? 어떻게 뿌리를 뽑았는데 다시 뿌리가 생길 수 있어?"
"진짜야. 엄마가 확인했어. 진짜로 줄기가 땅에 닿아서 거기에 다시 뿌리가 생겼더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있지. 뿌리가 없으면 진작에 죽었겠지."
관리는커녕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 왔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은 것 같았다.